[칼럼] 이름 없음에서 선언으로 - "나는, 우리는 노동자다!"
나는 비매품이라 나를 팔지는 않아, 언제라도나는 거부한 거야 거절당한 게 아냐, 누구라도- 싱어송라이터 윤영배의 노래 <선언>의 시작 부분에서이름과 물음 “김매니저”, “김프로”, “김기사”, “김선생”, “김팀장”, “김작가”, “김사장”, “김씨”, 혹은 그냥 “아저씨”, “아줌마” …, 우리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운동 이후 ‘3.3 노동이 뭐예요?’가 지난 수년 동안 매번 마주해온 물음이었다면, 이제 ‘3.3 노동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로 질문이 옮겨질 수 있었다. 이 변화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문제의식의 진전이라는 점은 긍정할 수 있는 단면이고, 동시에 문제의 심화를 의미한다는 점은 부정적인 단면이다. 1970년 11월, 청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를 외치며 산화했다. 반세기 이상이 지난 지금, 21세기 복판으로 달려가는 시기에 근로기준법의 예외로 취급당하는 노동자, 또는 노동자가 분명함에도 부정당하는 노동자가 대규모로 폭증하고 있다. 노동자로서의 이름과 권리를 빼앗긴 ‘가짜 3.3 노동자’, 4대 보험을 보장받지 못하고 위장고용 수단으로 내몰린 노동자가 산업부문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거창하게 휘날리는 ‘OECD 경제대국’이라는, 공허한 슬로건의 그늘에서 경제산업의 규모만 커지고 사람-노동자의 자리는 좁아졌다. 각각 일하며 살아가는 분야는 달라도 시장논리와 노동소외는 경계를 지켜주지 않기에 자본의 독점, 생산구조의 왜곡 그리고 생존권 문제라는 지점에서 만난다. 질병마저 세계화하는 신자유주의는 사회의 약자이며 경제 소외계층인 노동자를 더욱 궁지로 몰아세운다. 특히 청년과 여성 그리고 소수자는 사다리 첫 간에 발을 올려놓더라도 주어진 가능성은 두어 간 짜리 사다리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되새겨야 한다. 그렇게 나무껍질 속의 벌레를 찾아 쪼아대는 새처럼 부지런히 일해도 ‘K-무엇’으로 불리는 거대한 곡간 옆에서 굶주리고 있다. 이렇듯 직종을 불문하고 노동 현실이 위급해진 시기이며, 이면우 시인의 <감자 먹는 사람들>의 한 부분, 그러니까 “여럿이 함께, 감자 먹어야 될 시절이 큰 배에 실려 바다를 건너오고 있는 중이라는 소문을 들었소”가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시절이다. 이른바 플랫폼 노동자, 특수고용 노동자, 프리랜서뿐만 아니라 ‘온갖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노동자들의 고용보험과 산재보험 가입률이 낮다는 사실, 건강보험과 국민연금은 지역가입자 비중이 크다는 사실은 불안정‧불안전 구조를 드러내는 지표들이다. 직업적 특수성보다 실태적 보편성에 더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비정규 불안정 노동, 불명확한 노동관계의 일상화이다. 여기에는 불안정 노동·수입과 불확실한 미래라는 ‘2불 상황’과 미조직화의 특징이 있고, 미조직화가 ‘2불 상황’의 개선과 발언권 제고를 요원하게 하는 악순환 구조가 도사린다. 노동유연화는 시장권력의 필요에 정치·행정권력이 부응하여 노동을 비정규·특수고용·계약직화함으로써 노동조합을 무력화하고 노동자의 결속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노동환경 불안정성, 그리고 실질적 권한과 책임을 분리하는 고용관계의 불명확성은 신자유주의 노동시장을 관통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그 피해가 노동의 (정규․비정규직) 분할과 내부격차의 발생 그리고 직종별 세대화/성별화 진행에 의하여 집단적‧동시적으로 체감되지 않는 국면에 접어들었다. 싸워야 할 대상은 장막 너머로 숨어들고 조직적 연대와 저항을 약화한 것이다. 이 문제는 특히 청년·노인·여성노동 등 우리 사회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지 않은가. 시대와 선언 고대 그리스에서 멋 부리길 좋아했다는 한 노인은 치장하고도 시간이 남았는지 책을 썼다. 그 사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는 연민과 공포의 차이를 적어둔 구절이 있다. 우리와 다른 사람이 부당하게 불행을 당할 때 연민을, 자신과 유사한 사람이 그러할 때 공포를 느낀다고. 지금 다수가 연민이 아니라 공포를 느끼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공포사회에 살고 있다. 공산화 공포로 보수정치 체제를 유지하는 공포사회에 살고 있다. 전쟁 공포로 징병제, 막대한 군사비, 외국 군대의 주둔을 허용하는 공포사회에 살고 있다. 재난 공포로 자본주의 문제를 오히려 심화시키는 대안을 제출하고 있는 공포사회에 살고 있다. 그리고 노동자 서민은 언제든, 어디서든, 누구든 죽어 나갈 수 있는 공포사회에 살고 있다. 이 공포를 분노로, 행동으로, 행동하는 분노로 바꿔내야 내가 살 수 있다.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여 같이 생존할 수 있는 조건을 함께 요구하고 마련해야 우리가 살 수 있다. 기성의 틀에 안주하며 각자도생을 내면화하는 것은 제 뿌리를 잘라내는 셈이다. 얼마간은 살아있는 듯 보이고 꽃을 피울지는 몰라도 뿌리 잘린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한 채 땔감이 되고 만다. 이 사회에 법과 제도의 바깥으로 내몰린 노동자가 많다. 울타리 없는 노동자가 너무 많다. 당사자들이 힘을 모으고, 정치와 행정이 바꿔가며 새로 내야 할 길이 많다. 그것은 우리의 역할과 가능성 또한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노동의 문제를 직시하는 운동이 절실한 상황에서 목소리와 힘을 모아내야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고, 분야의 벽을 넘어 연대하지 않으면 보장받을 수 없는 권리가 있다. 자본에 예속되어 굴복하지 않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법을 녹여내려는 주체의 형성이 필요했다. 2026년에 창립 7주년을 맞는 권리찾기유니온도 그러한 몸짓 중 하나였다.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 ‘4대 보험 미적용 3.3 노동자’의 권리회복을 위하여 다양한 활동을 벌였고, 특히 ‘가짜 3.3 노동’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에 앞장섰다. ‘헌법 33조 실현’과 ‘근로기준법 차별폐지’ 그리고 노동조합 없는 노동자, 노동자이면서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못하는 노동자, 가짜 3.3 노동자를 위한 노동조합의 길을 만들고자 했다.나의 꿈은 나고 너의 꿈은 너고 우리의 꿈의 주인공은 지금 여기, 우리 나의 내 하루의 나를 일으켜 네 손을 마주 잡고, 달려 - 싱어송라이터 윤영배의 노래 <선언>의 마지막 부분에서자본과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 것들은 끈 떨어진 인형으로 취급받지만, 바로 이때 비로소 조종당하는 물체가 아니라 스스로 한쪽 무릎부터 세우기 시작하는 몸의 가능성이 탄생한다. 척박함 속에서도 첨벙거리며 늪에 발을 담그고 바짓가랑이를 적실 정도의 애정과 책임감을 지니고 ‘놓인 곳에서 가꿈’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다. 생각을 바꾸면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비슷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더 생겨날 수 있다. 길을 걸으며 ‘여기 한 사람 있소!’라고 말하면, 또 누군가 ‘여기에도 한 사람 더 있소!’라고 말하고, 그들을 보고서 또 다른 누군가가 ‘여기에도 한 사람 또 있소!’라며 만나는 장면을 꿈꾸는 것이야말로 가치 있는 일이며, 거대한 구조의 ‘틈’을 찾아내는 ‘짓’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이라면 주체, 체제를 극복하는 새로운 주체가 될 가능성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연대하며, 서로 잇고, 넓혀갈 것이다. 이름 없던 누군가에서, “나는, 우리는 노동자”라고 선언하는 주체로! [사진] 3.3 노동자 권리찾기 시민광장(25.11.4, 화정역 문화광장) 글 나도원 권리찾기유니온 사무총장 ··· ··· ···bit.ly/삼쩜삼상담(3.3 노동자 권리찾기 상담 :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칼럼]
나도원
25-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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