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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삶을 ‘권유하다 전(展)’ | 현장

  • 이정호
  • 2020-08-18 10:30
  • 9,306회

이 땅에 형식적 민주주의를 뿌리내린 87년 6월 항쟁이 끝난 지 30년도 넘었다. 그런데도 노동법의 기초인 근로기준법도 온전하게 적용받지 못하는 5명 미만 사업장 노동자가 580만명에 달한다. 여기에 220만명 넘는 특수고용직과 임시직 노동자까지 치면 2천만 노동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저임금·장시간·무권리 상태다.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한국은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시작한 지 반세기 만에 세계 7번째로 ‘3050클럽’에 가입했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3만 달러 이상이면서 인구가 5천만명 이상인 명실상부한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이런 나라에서 절반의 노동자가 노조가입조차 못한 채 살아간다. 한국이 선진국이 된 비결은 이처럼 ‘노동 후진국’이라서다. 자살률 1위, 산업재해 1위에, 출산율은 뒤에서 1위인 게 다 이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은 한국의 1천만 ‘그림자 노동’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자본 선진국이면서 동시에 노동 후진국인 이 구조적 모순을 성찰하지 않고선 이 땅에 미래는 없다. 1천만명의 불안정 노동을 문명사적 위기로 받아들이지 않고선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다.

 

국가와 자본은 입만 열었다 하면 4차 산업혁명으로 위기를 돌파하자지만 80년대 이후 오늘까지 3차 산업혁명이 가져온 파국을 보면 이마저도 쉽지 않다. 산업혁명은 격차를 줄이기는커녕 늘 벌려 왔다. 격차사회의 주범인 자본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지지 않을 것이다.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어선 지 1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전체 가구의 40% 이상이 무주택자다. 그런데도 정부는 공급 확대책을 내놓고, 자본은 건설기술 혁신을 말한다. 자본에 책임을 물어야 할 국가는 오히려 조삼모사의 술수만 부린다.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노동자 대다수는 각자와 가족의 생존을 책임지기도 버겁다. 바로 이 시기에 문화예술가들이 권리를 잃어버린 이 땅 1천만 노동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름하여 ‘아름다운 삶을 권유하다 展(전)’이다. 문화연대와 권리찾기유니온 권유하다는 21일부터 다음달 2일까지 서울 종로구 효자로 21 인디프레스 갤러리에서 후원전시회를 연다. 주재환·신학철·김정헌·민정기·임옥상·이종구·박불똥 등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던 24명의 거장이 작품을 내놨다.

 

권유하다는 권리를 박탈당한 1천만 노동자를 모으려고 지난해 10월9일 출범했다. 경향신문은 권유하다가 지난 2월5일 온라인 플랫폼 ‘권리찾기 유니온’을 개통하자 다음 날 논설위원 고정칼럼 ‘여적’에 “낮은 곳을 주시하는 ‘권유하다’, 참 이름 잘 정했다”고 상찬했다. 59년 이승만 독재정권의 발악에 온몸으로 저항하며 신문사 폐간까지 불렀던 유서 깊은 ‘여적’이란 지면이어서 더 고마웠다.

 

노동과 예술이 서로를 백안시하는 관행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분리해 온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서로의 외면은 영혼 없는 노동과 추상을 떠도는 실체 없는 예술로 분리돼 공동체의 분열을 강화하고 자본과 국가에 독주의 기회만 더 베풀 뿐이다. 예술은 잠수함 속 토끼와 같다. 예술은 사치품이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삶과 영혼의 건강을 위한 필수품이다.

 

가장 많은 시간을, 가장 힘든 일을, 가장 적은 임금으로 수행하는 무권리 노동자야말로 오늘 이 세계를 아직도 굴러가게 만드는 유일한 동력이다. ‘권유하다 전’은 이런 무권리 노동자의 권리를 담보로 쌓아 올린 탐욕의 바벨탑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노동과 예술이 서로의 책임을 깊이 각성하고, 그 속에서 창조적 연대로 시대의 부름에 답해야 한다고 말한다. ‘권유하다 전’이 늦여름 청와대 앞 1인 시위나 기자회견 가는 비정규 노동자의 방문을 기다린다. 정부청사 창성동별관 아래 인디프레스에서.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이정호  labortoday

 

※ 이 기사는 매일노동뉴스에 중복 게재되었습니다.

 

 

이정호

권유하다 편집위원

Tag : #유니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