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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유하는 사람들] ③ 김기남 ‘흔들리며 피어난,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 | 사람

  • 김우
  • 2020-08-05 14:00
  • 2,396회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간암으로, 있던 재산도 아버지도 사라졌다. 뚝섬 우범지대에 살았다. 나중에도 삼청교육대에 3집 걸러 1집꼴로 잡혀가는 동네였다. 태권도 선수였지만 학비도 못 내는데 훈련비며 시합비를 낼 도리가 없었다. 코치와 감독에게 너무 많이 맞아서 운동을 그만두었다.

 

운동하면서 맞는 일에 이골이 났지만, 일진도 돈을 상납하라며 때려댔다. 맞지 않으려면 돈을 가져가야 했지만, 집에 오니 한전에서 전기를 끊으러 와 있었다. 돈을 가져다 바치지 않으니 쉬는 시간마다 불려 나가 맞았다. 운동을 했지만 체구가 작았고 그들은 여럿이었다.


그렇게 맞다가 ‘왜 맞아야 하지?’ 하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 지갑의 돈을 훔쳐 도끼를 사서 맞섰다. 거대해 보였던 저들이 ‘별 거 아니구나.’ 느껴졌다. 때리는 이들에 맞서며 폭력을 알게 됐다. 

 

 

꽃보다 꽃다방 


고등학교 때 가출과 퇴학을 하고 중국집 배달을 하며 세상에 나왔다. 분식집에 ‘스카우트’ 돼서 배달하러 다니다가 DJ란 멋진 직업을 접했다. 무조건 알려 달라고 매달렸다. 다방으로 출근해서 청소하고 판을 닦으며 기회를 노렸다. 다른 사람이 ‘빵꾸’를 내면 메꾸면서 조금씩 노하우를 쌓아갔다. 18세의 개그 DJ였다. 

 

“개그요? 저한테도 재밌는 얘기, 하나 해주세요.”


“그냥 앉아만 있어도 웃으며 좋아했지.”


‘대박’이라고 해야 할까, ‘헐’이라고 받아야 할까. 당시 3대 다방 중 하나인 ‘꽃다방 DJ’로 주가를 날렸다. 사람들은 24시간 영업을 하는 다방 복도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서 음악을 듣고 사인을 받아 갔다. 이런 화려한 날들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큰아이가 태어나고 회사, 공장, 노가다 등을 거쳐 아내와 포장마차를 꾸렸다. 그날의 재료는 그날 소진했다. 음식은 신선했고, 아내는 기억력이 좋았다. 손님들은 자신을 기억해 주는 포장마차에 다시 오길 마다하지 않았다. 빚도 갚고 돈도 모으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헛바람’이 들어 단란주점을 차리면서는 1년 반 만에 털어먹었다. 

 

포장마차를 하며 노점상 연합회, 철거민 연합회 활동을 했지만 친한 친구가 말렸다. ‘똑똑한 놈의 부속품밖에 안 된다, 넌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다’는 만류였다. 친구가 죽고 유언 같은 만류를 받아들였다. 운동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5년여를 지냈다. 폭력으로 감옥을 드나들고, 사채놀이도 했다. 

 

 

[사진1] 한상균 동지와 함께

 

 

감옥에서 배우고 투쟁으로 성장하고


놓아버렸던 운동이 내민 손을 7년 만에 다시 잡았다.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비로소 진실한 동지를 만나고 연대를 알게 됐다. 2015년 민중 총궐기. 한상균 동지가 잡히고 3일 뒤쯤 김기남의 1심 선고가 있었다. 모두 집행유예로 나올 거라고 했지만 법정 구속됐다. 교도관이 부러 보일러도 틀어주지 않던, 몹시도 추웠던 날로 기억한다. 

 

수감생활 중 몸이 안 좋아 외부 진료를 나갔다. 아버지도 형님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김기남의 간에도 혹이 자라고 있었다. 


모든 걸 내려놓았다. 갈아먹고 싶고, 이글이글 증오로 불타던 마음도 내려놓았다. 살아온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면서 후회가 컸다. 내 딴엔 나도 살려고 열심히 아등바등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못되게 굴고 아픔을 주었다는 후회였다.

 

종양은 다행히 양성이었다. 다시 주어진 삶을 새롭게 살기로 했다. 8개월 캠핑을 하며 전국을 돌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문했다. 예전엔 나서서 뭔가 해야지 싶었다. 이제는 나서기보다 뒤에서 지원하고 버티고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돈을 못 벌어도 좋으니 연대하고 관계 맺으며 살고 싶었다. 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징역으로 배운 목공이었다.

 

 

[사진2] 태일 공방에서

 

 

태일 공방


김기남은 험한 삶을 살아왔고 그 가운데 사람 보는 눈을 길렀다. 앞과 뒤가 같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같은 사람을 알아본다. 인생의 변곡점이었던 시기 만난 사람들. 유의선, 한석호, 이영주, 한상균. 진정성으로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고 ‘나는 저렇게는 못 해도 흉내는 내보자’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 사람들이다. 자기 이익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없는 사람들은 하나라는 깨달음을 준 아름다운 인연들이다. 


남부 구치소에 있을 때 서울 구치소에 있는 한상균 동지와 서로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안부를 묻고, 힘겨움을 나누는 옥중서신은 꽤나 애틋하지 않았을는지.

 

전태일 재단 해설사 교육을 받으며 전태일 정신은 결국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자와 노점상이 무슨 상관있나 싶었지만. 김기남의 누나는 봉제공장, 형은 유리공장 노동자였다. 동네의 형과 누나도 공장에서 두들겨 맞고 성폭행당하던 노동자였다. 그들에게 전태일의 사랑 같은 마음을 줘 본 적이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았다. 동지들에게 필요한 거 갖다주고 싶고, 원가에 넘겨주고 싶은 공방의 이름은 그렇게 ‘전태일과 함께하는 태일 공방’이 됐다.

 

“항상 차별 속에 살아왔던 난데. 그런 차별 안 받을 수 있는 세상은 가진 자가 만들어 주는 게 아니지.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거지.”


그러려면 주위 좀 더 많은 사람이 권유하다를 알아주고 마음이든 시간이든 보태줬으면 좋겠다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이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여기서도 소외되고 버려지는 일 없길 바란다고 말한다. 

 

권유하다 발기인이기도 한 김기남은 권유하다에 현판 4종과 커다란 탁자를 선물로 주었다. 선물을 주고 행복을 받았으니 그만이라고 한다. 한상균 동지가 고맙다고 SNS에 올려줘서 홍보도 되니 고마울 따름이라고. “그렇다고 연락 오는 데도 없지만”의 대목에선 내가 다 아쉽다. 

 

 

[사진3] 권유하다에 선물한 현판과 탁자

 

살아있는 눈빛 때문에 싸우고, 서로 때리고 맞으며 싸워도 전과가 있어 죄가 덧씌워지는 가운데 50년 ‘불법 인생’을 살았다는 그이가 전태일의 연대 정신을 구현하려 한다. ‘권리찾기유니온 공식후원노조 인증패’를 제작 중이면서도 권유하다 활동가들 명찰을 만들어주겠다는 김기남. ‘헌 집 줄게, 새집 다오’가 아니라 ‘작품 줄게, 기쁘게 받아다오’ 주고 또 주고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는 김기남과 태일 공방을 응원한다.

 

 

[사진4] '연락을 기다리는' 태일 공방

 

 

김우

권유하다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