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민 고용보험 시대를 열겠다는 정부와 정치권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20년 넘은 오래된 숙제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화두가 됐다.
경제활동인구가 2700만 명이 넘는 나라에서 고용보험 가입자는 그 절반인 1375만 명 수준에 그친다. 일하는 사람 둘 중 하나는 일이 끊겨도 고용안정망 밖에 방치돼 실업급여를 못 받는다. 갑자기 화두가 된 ‘전국민 고용보험’은 지난 5월1일 강기정 수석이 “전국민 고용보험을 갖추는 것이 포스트 코로나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됐다”고 운을 떼면서부터다. 사흘 뒤 박광온 민주당 최고위원은 4일 최고위에서 “경제위기 극복에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게 전국민 고용보험 제도이고, 이번 국회에서 처리할 수 있다”고 했다. 박찬대 원내대변인은 7일 정책조정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나 “(이 내용은) 당론으로 제시됐다고 봐야 한다”고 화답했다.
반대로 한겨레신문은 5월9일 ‘단독’이란 딱지를 붙여 “민주당 ‘전국민 고용보험 추진 어렵다’ 결론 내려”라는 기사도 썼다. 이게 뭐지? 집권 민주당과 정부가 오락가락하는 사이 문재인 대통령은 5월10일 취임 3주년 특별연설에서 “임기 내에 ‘전국민 고용보험 시대’의 기초를 놓겠다”며 혼란을 정리했다. 사람들은 ‘전국민 고용보험’에 방점을 찍지만, 나는 ‘기초를 놓겠다’에 방점을 찍으며 대통령 말을 해독한다. 당장은 ‘안 하겠다’는 거다. 20년 관행대로 특례조항 만들어 위장 자영업자(특수고용직)를 고르고 골라 찔끔찔끔 개선하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전국민 고용보험은 ‘갑툭튀’ 아니다
1993년 제정해 만들어 1995년부터 시행해온 고용보험법은 90년대 말 IMF 위기 때 톡톡히 한 몫을 했다. YS 정권이 이 법을 만들지 않은채 IMF를 맞았다면...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그러나 25년 전 첫 도입 때 이 법에 따라 실업급여를 받는 건 무려 30인 이상 사업장에서 일하다 해고된 사람 뿐이었다. 말도 못하게 사각지대가 크고 깊고 넓었다.
당연히 IMF 정리해고가 판치던 1998년부터 고용보험법 사각지대 해소와 전국민 고용보험 시대로 가자는 요구가 빗발쳤다. 정부와 정치권은 이런 요구에 22년째 침묵한채 찔끔 개선만 해왔다.
[사진1] 홍민기 한국노동연구원 동향분석실잘이 지난달 21일 정의당이 주최한 ‘전국민고용보험제 도입을 위한 긴급토론회’에 나와 발제하고 있다. ⓒ 정의당
대통령 연설 다음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고용보험 가입 대상을 예술인까지 확대하는 고용보험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그 많은 특수고용직 가운데 딱 예술인만 확대하겠다는 거다. 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와 고용노동부 산하 고용보험위원회가 2년전 이미 의결한 것보다 훨씬 후퇴된 내용이다.
코로나19 위기는 가장 먼저 특수고용직과 프리랜서, 개인사업자, 비정규직을 덮쳤다. 몇 달째 닫힌 학원과 수영장 강사, 집으로 찾아가는 서비스를 해온 재가요양보호사, 회식 금지로 손님 끊긴 대리운전 기사, 극단 문이 닫힌 예술인, 여행 가이드 등이 모두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도 없는 사람이다.
코로나19로 ‘전 국민 고용보험’ 담론이 떴지만 고용보험제도 개편은 고용노동부 산하 고용보험위원회가 2017년부터 제도개선 TF를 구성해 사각지대 해소를 논의했다. 특히 특수고용, 플랫폼노동자, 예술인은 노동자에 가까워 우선 확대를 논의했다. 고용보험위원회는 2018년 7월31일 논의 결과를 의결했다. 그 결과를 담아 2018년 11월 민주당 한정애 의원 대표발의로 법안으로도 제출됐다. 그런데 20대 국회는 1년반 동안 법안 논의를 미루다가 지난달 마지막 본회의에서 예술인만 그마저도 특례로 넣은채 마무리했다. 그러면서 2018년 합의된 고용보험개편안은 사라졌다.
20년째 찔끔 개혁, 이번엔 확 바꿔야
특례 방식의 확대는 아무 효과가 없는 게 이미 확인됐다. 2007년 산재보험에 처음 특수고용을 특례 적용해 일부 직종이 들어갔다. 지금은 9개 직종까지 늘었다. 보통 산재보험료는 사업주가 산재보험료를 전액 내는데, 특례로 들어간 특수고용직은 사업주와 노동자가 반씩 나눠 낸다. 그만큼 노동자 부담이 크다. 이 때문에 기업은 노동자와 고용계약을 맺지 않고 특수고용으로 전환하는 걸 부추긴다. 그래서 가입률은 지극히 낮다.
근로계약서를 쓴 임금근로자만 대상으로 한 고용보험은 지금 현실에 맞지 않고, 오히려 기업이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악용돼 불안정노동만 확대한다. 특례 방식으로 특수고용직 모두 가입을 허용해도 가입률을 오르지 않는다.
[사진2] 한겨레신문 2020년 5월12일 6면
경사노위에서 사회안전망 개선위원장으로 활동했던 장지연 박사가 설계한 ‘전국민 고용보험제’ 모델이 논의를 주도하고 있다. 최근 여러 토론회에서 발표되는 이 모델을 살펴보면 임금에서 떼내 적립하는 지금의 고용보험료를 근로·사업소득 과세로 개편해 직장인, 자영업자 등 모든 취업자가 똑같이 세금 내고 실업 때 돌려받도록 하겠다는 거다. 국세청의 자영업자 소득 파악도 충분하다. 이렇게 해도 여전히 실업급여 못 받는 구직자가 생기는데 이들 중 저소득층이나 첫 구직자인 청년층, 경력단절여성, 장기실업자에겐 ‘실업부조’제도 도입이 필요하다. 일거리가 반으로 줄어든 특수고용직에겐 ‘부분 실업’을 인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사용주 부담금은 ‘이윤’에 비례해야
현재 기업이 내는 고용보험료는 고용한 노동자 임금 크기와 숫자에 비례한다. 그 많이 고용하고 더 높은 임금을 주는 기업은 고용보험료도 더 많이 내왔다. 그러다보니 기업은 4대보험 부담을 피하려고 간접고용이나 특수고용직을 늘려왔다. 국세청이 고용보험료를 조세로 징수하면서 법인세처럼 ‘이윤’에 매기는 방안을 제안했다. 기업이 내는 고용보험료를 임금 비례에서 이윤 비례로 전환하면, 첫째 기업 총 부담액은 변화가 없지만, 이윤 많은 대기업이 지금보다 더 많이 내고, 이윤 적은 중소기업은 지금보다 적게 낸다. 즉 누진성이 강화된다. 둘째 고용한 노동자 임금에 비례하지 않기에 기업의 고용 부담이 완화된다. 자본집약적 기업은 더 많이 내고 노동집약적 기업의 부담은 상대적으로 완화된다.
현재 자영업자 본인 부담률은 2.25%로 임금노동자가 부담하는 0.8%보다 훨씬 많다. 둘을 맞추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려면 무늬만 자영업자인 특수고용직의 진짜 사장을 찾아주는 정부의 노력도 필요하다.
글
이정호
권유하다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