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씨를 만난 적이 있는지 물었다. 친척이 모여 사는 고향 마을을 벗어나선 단 한 명을 만났단다. 드문 성씨만큼 흔치 않은 사람 복기성.
“저 똘끼 있어요.”
싫은 건 싫다고 말해야 하고, 싫은 사람이랑 밥 먹으면 소화도 안 될 뿐더러 실제로 다크 서클까지 생긴다는, 몸부터 솔직한 사람. 자기주장 밀고 가는 고집이 세서 아무도 못 꺾는다는 사람. 상또라이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그이를 평택으로 찾아가 만났다.
상또라이 ‘부심’
인터뷰 전의 첫 만남은 권리찾기유니온 권유하다(이하 권유하다) 사무실에서였다. ‘누가 부탁한 것도 아닌데 권유하다 주춧돌 기금을 최대로 조직한 사람’. 사무실에 와서 명단이며 금액이며 정리한 내용을 주고 바람처럼 돌아간 그이를 설명하는 말이었다. 돌아가면서는 사무실 활동가들 회식에 보태라고 금일봉까지 주었다고.
두 번째 만남은 ‘일하는 사람 모두의 권리 진짜뉴스 시민발언대’ 시간이었다. 제일 먼저 행사 장소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테이블 설치부터 도왔다. 세 번째 만남도 ‘아름다웠다.’ 주춧돌 기금 추가 모금내용을 전하고 사무실 활동가들 밥술을 사는 자리였다. 자발성과 헌신성의 화신 같은 그이가 궁금해졌다.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어떻게 굴러먹었는지 찬찬히 들어보았다. 고향은 충남 예산 신례원리. 취업전문학교에서 자격증을 따서 군납업체 공장에서 병역 특례자로 일했다고.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어머니는 보험 일을 하시고, 아버지는 10년여 앓다가 복기성이 중2 때 간경화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72세인 요즘까지도 보험 일을 하시고. 가난은 태어날 때부터 이골이 난 것이었다.
평범하고 조용하고 착하게 살려 노력한 아이. 복기성이 돌아보는 유년의 자신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신문을 돌려 용돈을 벌었다고. 충남방직 넓고 긴 공장건물에 신문을 돌리다 보면 휴게시간에 나와 있던 여공 누나들이 사탕도 주고 껌도 주었단다. 19살 때부터 시작한 공장살이. 그렇게 공장은 어려서부터 친근감으로 자리 잡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술을 과하게 드시니 오히려 술과 담배를 20대 때 늦게 배운 건실한 청년. 말 없고 숫기 없는 청년이 노조하는 삶을 산다는 건 예산 사람들은 생각도 못 하는 일이었단다.
[사진1] 2012년 11월20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해고자들이 쌍용차 평택공장 앞 송전탑에 올라 복직을 요구하는 고공농성에 들어갔다. 오른쪽 서 있는 이가 복기성 쌍용차비정규직지회 수석부지회장. ⓒ민주노총
서서히 타오르고 활활 타오르고
25살이던 2001년 경기도로 나왔다. “왜 경기도로 나온 거예요?”
“시골에서 큰 도시로 가봐야 한다고 해서요.”
기아차 화성공장에 비정규직으로 취업했다. 식당에 붙은 풍물패 모집 광고를 봤다. 노조 문화패였다. 가난해서 고3 때부터 공장에서 일해야 했던 것처럼. 성장해서 큰 도시로 나온 것처럼. 노동운동도 자연스럽게 시작했다고 회고한다.
“굳이 계기가 있거나 했던 게 아니에요. 내가 다가간 건지 내게 온 건지 모르겠지만요.”
부당함과 차별과 권위적인 게 싫었고 맞서야 한다는 생각이었단다. 원치 않았지만 비주류의 삶이었고, 충분히 겪어본 경험이었다.
기아차 퇴사 후엔 ‘차별철폐 100일 문화행진’에 참여했고 1천 500km에 가까운 길을 완주했다.
2003년 9월 쌍용차 평택공장에 비정규직으로 입사. 2008년 10월 비정규직 노조 결성. 2009년 5월 21일부터 77일 동안 점거 파업. 2012년 11월 20일부터 171일 동안 고공 농성. 2016년 2월 정규직으로 복직. 지독하게 끈질긴 싸움이었고 지독하게 끈질긴 복기성이었다.
[사진2] 쌍용차 평택공장이 내려다보이는 송전탑 위에서 171일을 농성했던 쌍용차 해고자들이 2013년 5월9일 내려왔다. 가운데 머리 긴 이가 복기성 쌍용차비정규직지회 수석부지회장. ⓒ민주노총
들어본 정도로, 기사를 읽은 정도로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쌍용차 파업과 해고, 이어진 죽음의 행렬과 복직. 그 안의 산 자와 죽은 자로 나뉜 통한의 눈물과 처절한 아픔을 우리가 어찌 알까.
끝까지 타오르는 장작 같은 사람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싸운 쌍용차. 첫 복직자 18명에는 비정규직 지회 19명 중 마지막까지 조합원으로 남은 6명 전원을 포함했다고 한다. 고공농성에도 쌍용차지부 전 지부장, 정비지회장, 비정규직지회 수석부지회장이 같이 올랐던 의미가 이어지고 깊어진 것이라 여겨진다.
“복기성 동지는 참 질긴 사람 같아요.”
“질긴지는 모르겠네요. 하지만 끝장을 보는 편이죠. 내뱉은 말에는 책임을 지고요. 약속한 말은 지켜요. 옆에서 ‘독해, 독해’라고 하죠.”
이런 사람이 쌍용차 파업과 해고와 복직까지 10년의 노력을 두 배 들인 것이 주춧돌 기금 조직이었다니. 그 규모와 금액은 얼마나 될까? 이제껏 물어보는 말에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해요?’ 토는 달면서도 또박또박 답해주던 이가 함구를 한다.
2020년 1월 10일 오전 11시 43분에 주춧돌 기금을 권유하기 시작했다는, 꼼꼼한 기억력 끝판왕의 소유자가 기억이 나지 않아서일 리는 없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나는 전달자로 메시지를 전했을 뿐이라고, 기금을 내고 싶은 마음 바탕에 기회를 준 것뿐이라고, 해고자와 비정규직의 1만 원이 여유 있는 이들의 100만 원보다 소중했다고, 명망가보다 오히려 이름 없는 이들과 통하며 마음이 녹아내렸다고, 생면부지인 경우에도 ‘꼭 필요한 일이다’라며 흔쾌히 마음 열어주었다고, 이들을 가슴에 새기고 품고 살겠다고 뜨겁게 얘기한다. 밀알이 되고 그림자가 되고 언저리의 한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담담히 얘기한다.
‘권유하다’는 내가 하고 싶은 운동이고 내가 가고 싶은 길이어서 휴일 반납하고 공들여서 주춧돌 기금을 모았다는 사람. 전화기에 저장된 모두에게 문자를 남기고 전화를 거는 치열함으로 모두의 가슴을 두드린 사람. 상처 때문에 쉬 정을 주지 않지만 한번 마음을 연 사람들과는 목숨 걸고 같이 할 거라는 사람. 종교가 있냐는 질문에 내 믿음은 ‘노동해방교’라고 거침없이 ‘진실로’ 말하는 사람. 흔치 않은 사람, 복기성이 흔해졌으면 좋겠다.
글
김우
권유하다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