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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권유하다 展’의 작가들에게 권유하다 | 칼럼

  • 심광현
  • 2020-07-22 14:19
  • 7,711회

권유하다와 문화연대, 시민자치문화센터는 오는 8월21일부터 9월2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디프레스 갤러리에서 ‘아름다운 삶을 권유하다’ 권리찾기유니온 후원 전시회를 개최합니다. 일하는 사람, 모두의 권리를 찾아 나선 권유하다 설립 정신에 공감하는 여러 작가들이 전시회 출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권리찾기유니온 홈페이지에서는 연속으로 작품과 작가 해설을 제공할 예정이며, 일부 작품은 온라인으로 구매 예약할 수 있습니다 ... <편집자>

 

 

1. 압축성장의 화려한 조명에 가려진 사각지대에서 퍼져 나오는 권리 찾기의 목소리   

 

[권리찾기유니온 권유하다(이하 ‘권유하다’)]는 일종의 노동조합운동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과 형식은 매우 낯설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라는 양대 노총이 활약하고 있음에도 법적으로 이에 가입할 권리를 박탈당한 수많은 노동자들이 직접 소통하고 단결해 노동3권을 쟁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플랫폼 형식의 노조’이기 때문이다. 당사자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은 6월 항쟁을 거쳐 군부독재를 종식하고 문민정부로 전환된 지도 근 30년이 지난 오늘의 상황에서 아직도 수많은 노동자가 노조에 가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대체 무슨 시대착오적 현상인가라고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숫자가 전체 노동자 2천만 명의 절반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경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020년 현재 한국의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 수는 통계상으로는 580만명이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5인 이상 사업장의 사업주들이 상당 부분 사업장을 쪼개어 4인 이하 사업장으로 신고해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숫자는 그보다 훨씬 크며, 특수고용 노동자 250만명 이상, 간접고용 임시직 노동자 400만명을 포함하면, 사실상 2천만 노동자 중 절반 혹은 그 이상이 ‘저임금/장시간/무권리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1970년 1인당 국민소득이 1천불에 불과했던 한국이 어떻게 5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세계에서 7번째로 [3050 국가(1인당 GDP 3만불 이상 인구 5천만 이상이 되는 국가)]로 도약했는지에 대한 비밀을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재료비용과 설비비용을 제외하면 ‘필요노동+잉여노동’으로 구성되는 상품 가격 중에서 잉여노동을 통한 이윤의 비율과 양을 최대한으로 높이려면 필요노동에 해당하는 임금의 비율과 양을 최저 상태로 유지하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 같은 고강도 착취가 지난 50여 년 이상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들의 절반에게 노동3권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결과가 얼마나 참담한지는 OECD통계가 잘 보여주고 있다. OECD 국가 중 네 번째로 높은 저임금(중위임금 2/3 미만) 노동자 비중, 여성 노동자의 35%가 저임금 노동자로서 OECD 국가 중 1위, 남녀임금격차 34.6% 로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 이에 반해 GDP 대비 복지 지출 중 공공사회복지지출 규모는 GDP 대비 11.1% 로 OECD 국가 중 멕시코, 칠레 이어 세 번째로 낮고, 1991년 ILO 회원국에 가입했지만, 우리가 비준한 협약 수는 189개 중 29개에 불과하며, ILO 핵심협약 비준 순위는 177위, 특히 87호 98호 협약을 비준하지 않은 국가는 OECD 35개 회원국 중 한국과 미국이 유일한 상황이다 한 마디로 ‘자본 선진국’이 된 비결이 바로 ‘노동 후진국’에 있는 셈이다.


이런 상태는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참상을 야기하고 있다. 자살률 세계 1위(연간 12,463명, 하루 3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고),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사망률 1위(2019년 산재 사고 사망자는 855명으로 처음으로 900명 이하로 떨어졌지만 여전히 1위), 세계 유일의 0점대 출산율(출산율 0.98). 또한 상위 20% 대 하위 20% 간 격차가 평균 순자산의 경우 125배에 달하고, 상위 10%가 전체 순자산의 43%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부동산의 경우, 50채 이상 주택소유자가 1,882명인 데 반해 무주택자 비율이 40%를 넘어서고, 노인빈곤율 43.8% 로 OECD 평균 14.8% 의 3배에 이르고 있다. 이것이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하늘을 하루가 멀게 가리고 있는 스카이스크래퍼들의 화려한 조명에 가려진 사각지대에서 고통 받는 민중의 삶의 실상이다(이상의 통계 자료는 모두 ‘21대 총선 21대 요구’(2020년 민주노총 자료집) 참조).


‘권유하다’는 이런 시대착오적인 현실을 뒤늦게나마 타개하기 위해 2019년 10월 9일 창립발기인 대회를 열고 ‘일하는 사람 누구나 권리찾기 1000일 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의 당사자이자 주체인 ‘5인 미만 작은 사업장 노동자들’, ‘임시직 노동자들’,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저임금/장시간/고강도 노동으로 시달리면서도 노동조합 결성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과 같은 노동3권이 현행법 상 보장되지 않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기 때문에 이들의 권리찾기 운동은 ‘온라인 플랫폼’을 구축해 무권리 노동자들의 소통, 상담, 권리행동을 할 수 있는 ‘당사자 권리행동’의 운동장으로 만드는 형식을 택했다고 한다(아래로부터의 권리 목록 작성, 근로계약서 서면 작성 교부 운동, ‘가짜 5인 미만 사업장’ 고발 등을 주요사업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 운동은 시작하자마자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장애와 마주쳐 빠르게 확산되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의해 오프라인 활동이 막혀 있는 상황에서 운동을 확산해가기 위한 보다 획기적이고 창의적인 방법, 노동계 내부와 외부의 적극적 협력 등이 필요한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이, 차제에 보다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 운동을 발생시킨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이에 맞선 운동 주체 형성의 경로, 향후 사회변동의 추세에 따른 운동의 장애 등에 대해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50주년, 민주노총 창립 25주년을 맞이한 오늘의 시점에서도 노동자의 절반에게 노동3권이 주어지지 않는 ‘노동 후진국’이면서도 G7에 참여할 정도로 ‘자본 선진국’으로 성장한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구조적 모순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는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4차산업혁명에 의해 이 모순이 더욱 심화될 2020년대를 헤쳐나가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선진성과 노동의 후진성 간의 간격을 더욱 벌릴 4차산업혁명의 추세를 고려한다면 현재 노동3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절반의 노동자들의 삶이 나머지 절반은 물론 사회 구성원 다수의 가까운 미래가 될 가능성이 높다, ‘불안정 노동’의 문제가 문명사적 위기에 처한 우리 모두의 문제로 새롭게 제기될 필요가 여기에 있다. 

 

 

2. 인공지능 시대의 노동과 예술의 책임

 

한 세기 전 러시아 혁명기의 미학자 미하일 바흐친은 예술과 생활이 서로에 대해 책임과 죄과를 공유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힘주어 ‘권유한’ 바 있다.

 

“사람이 예술 속에 있을 때 그는 생활 속에 있지 아니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과연 무엇이 인격의 각 요소들의 내적 연결성을 보장하는가. 그것은 오직 인격의 통일로만 가능하다. 예술 안에서 체험하고 이해한 것에 대해, 나는 스스로의 생활로 응답해야만 한다. 체험하고 이해한 모든 것이 생활에서 쓸모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하지만 그 책임에는 죄과도 연결되어 있다. 생활과 예술은 서로가 책임을 떠맡는 데에 그치지 않고, 죄과도 떠맡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인은 생활의 비속한 산문에 관해 자신의 시에 죄가 있다고 자신을 탓해 그것을 명심해야 하고, 한편 생활인은 예술의 황폐함에 관해 자기 생활의 소극적인 태도와 진지하지 못함에 죄가 있음을 깨달아야만 한다. 인격은 전면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따라서 ‘영감’을 끌어들여 무책임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예술과 생활은 같은 것은 아닐지라도, 내 안에서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책임의 통일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미하일 바흐친, ‘예술과 책임’, 최건영 역, 문학에디션뿔/㈜웅진씽크빅, 2011, 12~13쪽)

 

그런데 자산/소득/일자리 양극화와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오늘의 상황에서,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와 각종 교류의 중단으로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심리적 공황이 꼬리를 물며 소용돌이치는 상황에서 예술가나 노동자/생활인 대다수는 각자와 가족의 생존을 책임지기에도 바쁘다. 이 때문에 이런 주장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지만 이해한다고 해도 이를 ‘체화’해서 행동에 옮기기는 어렵다. 예술과 노동/생활의 긍정적 선순환을 위한 책임보다 예술과 노동/생활의 부정적 악순환에 대해 책임지기란 더욱 어렵다. 전자의 경우를 접하기도 매우 드물지만, 후자의 원인은 예술가나 생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자본에게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은 예술과 노동/생활의 황폐화/비속화의 주범(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기후위기를 비롯한 지구적 생태계 파괴의 주범)이지만 그 어느 것에 대해 책임지지도 죄과를 느끼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자산/소득/일자리 양극화와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와 더불어 가속화되고 있는 예술/생활/인격의 황폐화/비속화/파괴(와 지구적 환경 위기 등)를 포함한 오늘의 총체적 재난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과연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해 일정한 책임이 있는 국가가 최근에는 ‘그린 뉴딜’을 내세우며 문제 해결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정도 차이가 있을 뿐 대다수 국가들의 정책은 재난/위기의 주범인 자본의 압력에 떠밀려 부분적이고 일시적으로 책임을 떠맡는 일종의 제스처를 취하고 있을 뿐이다. 문재인 정부도 ‘그린 뉴딜’과 ‘휴먼 뉴딜’을 제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그동안 여러 장벽에 부딪쳐 지체되고 있던 4차산업혁명을 전면화시키려는 자본의 요구와 부합하는 ‘디지털 전환’을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뉴노멀’로 만들기 위한 노력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많은 언론 보도가 보여주듯이 긴급 편성된 정부 재난지원금의 주된 부분은 위기에 처한 자본에 대한 지원금이지 일자리를 상실한 노동자와 중소상인들에 대한 지원은 아니다). 


‘디지털 전환’, 즉 4차산업혁명(인공지능혁명)이 과연 일자리 창출에 기여할지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하지만 그 미래는 198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3차산업혁명(정보혁명)이 가져온 파국(자산/소득/일자리 양극화)을 돌아보면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생산수단의 자동화, 특히 인공지능화는 과거보다 훨씬 빠르고 광범위하게 생산과정에서 노동력 퇴출을 촉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런 위기가 노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런 변화는 예술 분야에서도 광범위하게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인공지능 작곡 및 인공지능 시나리오 소프트웨어, 인공지능 배우, 인공지능 촬영기기와 편집기기, 3D 프린터에 의한 조각과 건축, 인공지능 회화 소프트웨어 등). 아직은 ‘약한 인공지능’이 기계화된 생산수단과 다각도로 결합하는 단계에 불과하지만 2020년대 중후반 ‘강한 인공지능’이 등장할 경우 그 속도는 훨씬 빨라지고 범위도 크게 증가하게 될 것이다. 미국 인공지능 연구의 선두 주자인 레이커즈 커즈와일에 의하면 이런 추세는 2040년을 전후로 특이점에 이르러, 심지어 강한 인공지능을 만들고 통제할 수 있는 첨단 과학기술 연구 자체가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인공지능은 인간노동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들을 쉽게 해결하고 생활의 편의를 증진할 뿐만 아니라 생산성의 획기적인 향상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 자체로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인공지능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집단지성의 산물인 인공지능 기술의 도입으로 인한 성과의 대부분이 자본에게 귀속되는 반면 인류의 다수는 그로부터 배제되게 만드는 현재의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에 있다. 이 문제는 주택보급률이 이미 100%를 넘은 지가 오래되었음에도 전체 가구의 40% 이상이 무주택 상태에 처한 오늘의 주택문제의 근본 원인이 주택공급의 부족과 건설기술의 혁신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위 10%가 전체 자산의 40% 이상을 독점하고 있는데 있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 따라서 재난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묻는 것만으로는 결코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다시금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기는 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해결책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독점이라는 자본의 죄과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할 국가가 온전한 책임을 회피하거나 ‘조삼모사’의 술수만 부리고 있다면, 이들 모두의 죄과에 대한 책임을 사회 구성원 다수가 물으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과 국가의 누적된 죄과에 대한 책임을 물어 사태를 바로잡는다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국민 다수가 주권자로서의 책임을 자각하고 일어나 2016~2017 촛불항쟁을 통해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에 대한 책임을 물어 대통령을 탄핵하고 정권을 교체시켰고, 2020년 4.15총선을 통해 박근혜 정권의 수권정당이었던 미래통합당을 반토막낸 바 있다. 이런 경험들을 밑거름 삼아 사회 구성원들 다수가 그동안 자본과 국가의 전횡을 방관하거나 통제하지 못한 주권자로서의 책임/죄과를 통감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소통과 협력과 연대를 활성화해 나간다면 자본과 국가의 죄과에 대해 항시적으로 책임을 묻는 ‘새로운 정치적 형식’(자본이 독점한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생산과정의 민주화, 국민소환과 국민발의를 포함한 광범위한 직접민주주의의 제도화 등), 즉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형식을 발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정치적 형식을 발명하고 실현시키려면 자본과 국가에 대한 책임을 물을 사회 구성원 다수가 먼저 ‘주권자로서의 책임’을 자각해야 하고, 이 자각을 통해 적극적으로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고 연대하는 ‘새로운 문화적 형식’을 만들어야 한다. 앞서 인용한 바흐친의 권유에 주목할 필요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예술가와 노동자는 비록 자신들이 생활과 예술의 비속화/황폐화의 주범은 아니지만, 그동안 자신들의 방관과 소극적이고 진지하지 못한 태도가 자본/국가의 전횡을 억제하지 못했다는 주권자로서의 책임, 사회적 불평등과 생활의 고통과 생태계의 파괴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서로 공감해야 할 인격적 책임을 통감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광범위한 소통과 협력과 연대의 지속 가능성은 사회 구성원 다수가 이런 책임감을 얼마나 깊이 각성하고 성찰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노동자들이 참담한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며 행동하기 시작했을 때 같은 사회 구성원의 일부로서 이에 ‘응답하고 책임감을 공유’하면서 ‘소통과 협력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여 ‘현실을 변화시켜’ 나가는 데 동참하는 것이 우리 시대 예술의 진정한 책임일 것이다. 공공예술가 에스텔라 콘윌 마조조는 “좋은 것을 찾고 그것을 사건으로 만들기. 이것이 미술가가 하는 진짜 도전”(119쪽)이라고 역설한다. 미술가는 영혼의 지형과 외부 지형을 하나로 통합하여 우리 모두를 근원에서부터 “다시 일원으로 만드는’(re-member) 데 기여하는, 개인의 영혼과 공동체를 묶어내는 행동주의자라는 것이다.(수잔 레이시 편,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 지형 그리기’, 이영욱/김인규 옮김, 문화과학사, 1995) 

 

“시인 오드르 로드(Audre Lode)가 말한 것처럼 미술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다. 미술은 우리를 지탱하는 삶으로부터 분리된 어떤 것일 수 있다는 가정이나 또한 미술은 실로 일종의 사치품이라는 가정은, 외부 지형이 영혼에 영향을 주지 않고 변할 수 있다는 생각만큼이나 잘못된 이론이다.”(121쪽)      

 

노동자들이 예술을 생활과 분리된 ‘사치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예술가들이 예술을 일반적인 생활과 분리된, 특별한 재능과 영감을 통해서만 만들어낼 수 있는 ‘순수’ 예술이라고 간주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늘날과 같이 생활과 예술이 서로를 백안시하는 관행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라는 오래된 구조적 분리, 자본주의에 의해 더욱 강화된 계급적 생산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노동자와 예술가 서로가 생활과 예술의 분리를 당연시한다면 사회적 환경과 각자의 영혼의 분리가 공고해지고, ‘영혼 없는 기계적인 생활’과 ‘추상의 세계를 떠도는 고독한 영혼’으로 공동체의 분열이 강화됨으로써 자본과 국가의 일방적 독주가 용이해진다. 이런 관행에 그대로 따르는 것은 마치 4년, 5년에 한 번 형식적으로 투표권을 행사하지만 나머지 시간 동안에는 주권자로서의 권리와 책임을 모두 극소수의 정치인들에게 위임함으로써 사실상 주권자이기를 포기하고 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주권자로서의 권리에는 단지 노동3권(A)만이 아니라 각자의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하면서 삶의 질을 향유할 권리(B), 환경과 공동체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바로잡기 위해 표현하고 행동해야 할 권리(C)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이 세 가지 문제들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물고기와 물이 분리 불가능하게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듯이 모두가 맞물려 있다. 노동자들이 생존에 떠밀려 자연과 사회의 생태계 전체가 황폐해지고 있는 이상 징후를 감지하지 못한다 해도 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바로 예술가들의 역할이다. 노동자들이 노동자들의 권리(A)가 심각하게 훼손되었음을 알리는 목소리를 낼 때 예술가들은 노동3권의 훼손이 어떻게 주권자로서의 권리 B를 직간접적으로 훼손할 수밖에 없는지를 감지하고, 권리 C를 행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술은 잠수함 속의 토끼와 같다”, 예술이 사치품이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삶과 영혼의 건강을 위한 필수품이라는 시인들의 주장에 공감하는 것이다. 

 

 

3. ‘권유하다’의 ‘부름’과 ‘예술의 응답’ 

 

마조조는 예술의 목소리가 공동체에 울려 퍼져나갈 수 있는 효과적인 경로를 ‘블루스 형식’의 예를 들어 잘 제안한 바 있다: 첫 번째 진로는 부르는 것(call)이고, 두 번째는 응답하는 것(response)이고, 세 번째는 풀어주는 것(release)이다. “마지막 진로는 첫 번째와 운을 맞추는 가운데 궁극적으로는 당신을 자유롭게 한다.” 이 세 가지 진로를 가지고 ‘블루스 형식’은 불러내고, 불평하는 자를 응답하게 변화시키며,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일을 지속한다(123쪽)는 것이다. 바흐친이 말했던 ‘책임(responsibility)’이란 이렇게 ‘부름(call)’에 적극적으로 ‘응답(response)’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마조조는 청중이 응답할 수 있도록 예술가가 먼저 노래를 부른다고 말하지만, 그 순서가 고정된 것은 아니다. 노동자 청중이 예술가가 응답하도록 권유하는 부름을 먼저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서가 어찌되었건 마조조는 부름에 응답하는 방식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1) 부름 “노래 부르는 사람들이 기꺼이 진실과 일치하는 사건을 만드는 일을 하려는 새로운 사람들, 사태를 알고 있는 사람들 속으로 소리가 울려 퍼지도록” 불러야 하고, 


2) 응답 “변주의 가능성을 나타낼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청중을 창조적인 과정 속으로 초대하고 그들에게 힘을 부여하는 의미 있는 미술을 창조해야 한다.” 


3) 풀어주기 “우리의 청자들에게 아무런 의심 없이 ‘난 스스로 살펴 알게 되었어, 네 안에 하늘이 있다는 것을’ 이라고 선언하면서, 세 번째 진로가 하나의 돌파구임을 보증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노래해야 한다.”(124~125)

 

이 세 가지 진로를 ‘권유하다 전(展)’에 다음과 같이 적용해 볼 수 있겠다. 

 

1) 부름 - 작가들은 오늘 한국 사회의 노동자들 절반의 삶이 참혹한 상태에 처해 있음을 알리면서 노동3권의 회복이 시급하다는 노동자들의 외침을 ‘한국사회의 산소 부족 현상’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번역할 필요가 있다. 자본과 국가의 공모에 의한 이들의 권리 박탈이 지난 수십 년 간 심화되어온 사회적 양극화/불평등의 심화의 주된 원인임을 모두가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 문제의 극복을 위해 필요한 사회적 공감과 소통과 협력과 연대라는 “진실한 사건을 만드는 일을 기꺼이 하려는 사람들 속으로 부름의 소리가 울려 퍼지도록” 힘차게 응답할 필요가 있다.


2) 응답 - 이 응답이 과거와 오늘의 부정적 현실의 단순한 재현, 일 대 일 번역에 그치지 않도록, 작가들은 사회적 양극화/불평등의 현실을 “변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야 한다. 오늘의 노동/일/육체와 예술/놀이/정신의 부정적 악순환 고리를 깨고 미래의 노동과 예술의 긍정적 선순환 상태로 현실을 변주시킬 수 있는 가능한 경로를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형상화해야 한다. 이럴 경우라야 노동자로서의 권리 찾기의 목소리를 앞서 말한 3 가지 권리 회복을 위한 주권자로서의 행동으로 확산시키는 책임 있는 응답이 될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노동자 당사자들을 포함한 제반 관중을 “창조적인 과정 속으로 초대하고, 그들에게 힘을 부여하는 의미 있는 미술을 창조해야 한다”


3) 풀어주기 -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전시에 참여한 모든 관중들이 작품을 관람하면서 “난 스스로 살펴 알게 되었어, ‘네 안에 하늘이 있다는 것을’이라고 선언하면서”, ‘노동과 예술의 상호책임에 기반한 창조적 협력과 연대라는 새로운 사회적 네트워크의 형성’만이 문명사적 위기에 처한 우리 시대의 문제들에 대한 진정한 “돌파구임을 보증하는 방식”을 탐구해야 할 것이다.      

 

부름과 응답과 풀어주기의 릴레이가 귀결되는 초점은 “네 안에 하늘이 있다는 것”으로 수렴된다. 실제로 가장 많은 시간 동안 가장 힘든 일을 가장 적은 임금으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야말로 오늘 이 험난한 세계를 아직도 굴러가게 만드는 동력이자, 가슴 속에 열린 하늘을 품고 오염된 환경을 걸러주는 필터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강력한 콘트라스트에 초점을 맞추고, 눈부신 바벨탑에 가려진 어둠의 사각지대를 환하게 조명하여 그 안에서 숨쉬고 일하는 생명의 활력을 힘차게 이끌어낼 때, 모두가 주권자임을 각성하고 개인과 사회와 자연이 선순환하는 새로운 공동체 건설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돌파구가 열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흐친이 말했던, “생활과 예술이 서로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 “예술과 생활은 같은 것은 아닐지라도……나의 책임의 통일 안에서 하나가 되는”, 각자가 자신의 인격적 통일을 이루는 방식이 될 것이다. (끝)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