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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는 3개월짜리 ‘가짜 해방’ | 사람

  • 이정호
  • 2020-07-09 11:51
  • 6,041회

안재구 선생(1933~2020)이 8일 영면했다. 


내가 1993년 제대하고 수학 과외로 밥벌이할 때다. 단순계산만 가르치는 데 한계를 느껴 논리력을 길러주는 수학책이 없을까 해서 헌책방을 뒤졌다. 책방 귀퉁이에서 건진 ‘수학문화사’(일월서각, 1990)를 펴보고 깜짝 놀랐다. 


책은 “독립군이 초속 몇m로 흐르는 압록강에서 맞은 편 강기슭을 똑바로 보고 헤엄쳐 건너면 실제로는 하류 쪽으로 얼마나 떨어진 곳에 도착하나?”는 질문으로 삼각함수를 설명했다. 이렇게 나는 안재구 선생을 처음 접했다. 


1979년 남민전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안재구 선생은 1994년 구국전위 사건으로 다시 구속돼 5년을 더 옥살이해야 했다. 선생은 2013년 고향 밀양 땅에서 보낸 어린 시절부터 해방 전후까지의 자서전을 내놨다. ‘끝나지 않은 길’ 두 권은 각각 ‘가짜 해방’과 ‘찢어진 산하’라는 부제를 달고 세상에 나왔다. 


안재구 선생은 1933년 대구 외가에서 태어나 고향 밀양에서 항일혁명가인 할아버지 안병희 선생 밑에서 자랐다. 1947년 5월 밀양중 1학년 때 노동절 집회에 참가해 퇴학당하고 구속됐다. 1948년 2·7 구국투쟁에 참가한 뒤 남로당 밀양군당에서 활동했다. 

 

 

[사진] 안재구 선생이 2013년 서강대 동문회관에서 열린 ‘끝나지 않은 길’ 출판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통일뉴스

 

선생은 1949년 초등교원 임용시험에 합격해 1951년까지 달성군 구지초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1952년 경북대 사범대 수학과에 들어가 1958년 석사를 마치고 1970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석사를 마친 뒤부터 20년 가까이 수학과 교수를 지냈다. 


그러나 1976년 2월 ‘국가관 미확립’과 학생운동에 동정적이란 이유로 재임용에 탈락했다. 거리로 나온 안재구 선생은 1976년부터 1979년 10월 체포될 때까지 남민전에서 활동했다. 박정희 정권이 발악하던 1979년 체포돼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세계 수학자들의 항의로 2심에서 무기로 감형돼 1988년 12월 10년 만에 출옥했다. 


90년대 초 여러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다 1994년 6월 다시 구국전위 사건으로 아들과 함께 구속돼 다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99년 8월 5년 만에 석방됐다. 


선생은 이 책 ‘끝나지 않은 길’ 서문에 “자서전은 1945년 8·15 해방부터 시작해 1952년 4월 대학 입학으로 끝난다”고 아쉬워하면서도 이승만과 4·19, 박정희와 유신체제, 남민전, 6·15 시대까지 “글을 계속 써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때 선생의 나이가 벌써 팔순을 넘었을 때다. 


선생은 “8·15 해방을 석 달짜리 ‘가짜 해방’이라며, 이제 진짜 해방을 우리 민중의 힘으로 이루어내야 한다”고 다짐했다. 


해방된 1945년 연말이 가까워져 오자 한반도 남쪽에 진주한 미군은 군정청을 설치해 점령군으로 행세하고, 일제 통치의 주구들을 다시 불러들여 군정 통치의 하수인으로 고용했다. 일제 때 하급 관공서 관리했던 자들은 면장, 군수가 됐다. 경찰서에서 순사질하던 자들은 간부로 올라 모자에 금테를 두르고 서장이 됐다. 


선생의 할아버지 안병희는 해방 직후 여운형의 뜻에 따라 밀양의 애국자들을 모아 건국준비위원회 밀양지부를 구성했다. 얼마 뒤 친일 경찰서장은 할아버지를 구속했다. 


선생의 대구 외가 큰집 할배는 친일파들이 만든 한국민주당 도당 위원장을 맡아 대구에서 우익 정치인으로 으뜸이었다. 그래서 선생의 외가 친척 중엔 관리가 된 사람도 더러 있었다. 


미군정의 앞잡이가 된 이승만 일당이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해 백색테러로 공포 분위기를 조장했다. 이에 남로당은 적절한 투쟁으로 문제를 풀지 못했다. 선생은 청산주의 투쟁을 반복하거나 아니면 일단 도망치고 보자는 식으로 지리멸렬 흩어졌다고 평가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활동했지만 남로당 지도부는 북한의 책상 위에 앉아 있었다. 투쟁은 더욱 극단을 향해 갔다. 


선생이 1980년 전두환 신군부 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캐나다에서 열린 세계수학자대회에 참석한 수학자 수백 명이 연대서명해 한국 정부에 선생의 구명을 요청했다. 미분기하학과 응용해석학에서 세계적인 논문을 발표한 수학자에게 사형 선고는 가혹했다. 


역사는 이 대수학자를 오롯이 공부만 하게 내버려두지 않았고, 학자는 시대의 부름에 응답했다. 

 

이정호

권유하다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