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결같은 평가
임순광의 고향은 부산. 6살에 포항으로 이사 와서 초‧중‧고를 나왔고, 지금도 포항에서 민주노총 경북지역본부 정책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억양이며 말투가 완연한 경상도 사투리라서 인터뷰 도중 되묻게 되는 일이 몇 차례 있었다. 노사 단체협약 협상 자리에서 상대편이 기가 죽곤 했는데 쉬 알아듣지 못할 사투리로 기일게 게다가 소리 높여 말하니까 그랬다는 게 자체 해석이기도 하다.
사진 1. 1990년 형제와 함께. 왼쪽이 임순광. 안성기 씨 닮았대서 중학교 시절부터 별명이 '안생기' ⓒ임순광
한국비정규교수노조 경북대분회 사무국장을 맡던 시절. 수업에 농성에 병간호까지 겹치기 출연을 하며 치아 상태가 안 좋아져 과거보다 더 발음이 안 좋아졌다는 주장도 펼치는데. 2004년 9월 경북대분회의 천막농성 투쟁 때 얘기다.
구미 금오공대 수업 후 대구 경북대로 돌아와서 농성장을 지켰다. 연말부터는 형님 간호까지 맡았다. 한주의 절반은 농성장에서, 절반은 병원에서 잤다. 치열한 시간 끝에 1월 말 파업 투쟁에 승리해서 단협 합의서에 사인하던 날엔 어금니 2개가 빠지고 4개엔 금이 갔다니 말 다 했다.
파업 종료 뒤엔 경북대 분회장으로 출마했다. 대구경북 연구원으로 받던 300만 원 정도의 수입을 포기하고 월 20만 원의 노조 활동비를 선택한 거다. 그렇게 그의 선택지는 언제나 농성장이고 항상 노조이며 늘 투쟁의 현장이었다.
내가 만난, 그를 아는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제멋대로며 말이 많고 글이 길어 피곤하다고 장난처럼 타박하는 사람도, 이론과 글이 되는 드문 인물이라며 높이 사는 사람도 하나같이 같은 평가를 한다. 교수연구자 운동가인 그이가 ‘이론가뿐만 아니라 실천가’라는 것이다.
반면교사로 인생 역전
주변에서 ‘빵 체질’인 사람을 목격하곤 한다. 규칙적으로 먹고 자고 운동하며 오히려 푹 쉬고 나왔다는 뻥을 치며 웃는 경우다.
임순광은 사주를 보면 역마살, 도화살 이런 거 대신 ‘농성살’이라고 나오지 않을까 싶게 ‘농성 체질’인데.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관심과 저항적 실천은 언제부터였을까.
중학교 때부터 자료를 찾아보며 ‘이걸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사회학과를 자발적으로 선택했다지만. 아무래도 반골 기질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시절이지 싶다.
경북 전역에서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이 모이는 학교였다. 명문이라며 재수생이 대기하는 학교. 특수반을 두어 차별하는 구조에 유급생이 속출하는 학교. 1년에 2~3명은 정신과 치료를 받는 환자가 나오는 학교였다.
급기야 고1이던 10월에 중학교 때 전교학생회장이던 짝이 자살하는 충격적 현실을 마주했다.
비평준화, 학벌, 입시 과열 경쟁에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꼈다. 이때부터 여행을 다니며 열심히 놀았다. 중3 때 도내 고사에서 유일한 수학 점수 만점자였지만, 수학 보충수업에도 빠지고 자율 학습이라 부르던 타율 학습에도 불참했다.
자율 학습 하루 결석에 다섯 대의 매타작이 이어졌다. 허벅지가 시커멓게 터져나가며 전교에서 매를 가장 많이 맞는, 1위 학생이 됐다.
때리고 핀잔주는 건 물론 돌로 머리를 때리는 선생부터 구정물 위에 물구나무서기를 시켜서 지치면 구정물에 빠지게 하는 가학적인 선생까지. 선생들이 체벌로 친구들을 괴롭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곤혹스러웠다.
그런 선생과 그런 조직과 그런 제도가 싫던 마음을 교육 운동 분야에 대한 구조적 관심의 기초로 삼았다.
사진 2. 1975년 어머니와 형과 함께. 오른쪽이 임순광 ⓒ임순광
훌륭하지 않은 교사를 반면교사로 삼은 임순광의 변화와 마찬가지로 그이의 생에 엇비슷한 성장이 있다.
5살 때까지도 말을 하지 못하고 홍역 치료 약을 잘못 먹은 탓에 오른쪽 눈이 약시인데, 말 많은 사람으로 책을 끼고 사는 사람이 됐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소아마비 증세가 있어서 전교에서 운동을 가장 못 하던 아이가 평생 운동가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과 겹친다고나 할까.
광장과 거리에 살다
광장과 거리에서 학자와 교육자인 활동가로 살아가고 싶다는 임순광. 주요 활동 경력을 살펴봐도 단조롭지 않다.
한국비정규교수노조에서 꾸준히 활동한 외에도 교육혁명공동행동 공동대표, 대학공공성강화대책위 공동대표, 박근혜퇴진과민주평등국가시스템구성을위한전국교수연구자시국회의 집행위원, 사회적교육위원회 공동대표, 대학무상화평준화추진본부 집행위원장 등을 맡아 종횡무진 활약해 왔다.
사진 3. 2011년 비정규교수노조 첫 번째 위원장 시절. 상어라는 별칭에 어울리는 느낌 ⓒ임순광
사진 4. 2015년 비정규교수노조 두 번째 위원장 시절. 전국교수대회 중 이상진 민주노총 부위원장이 머리를 밀어주고 있다 ⓒ임순광
사진 5. 2018년 비정규교수노조 세 번째 위원장 시절. 국회 앞 농성장에서 강사법 개선안 입법 시행과 예산안 배정을 요구하며 ⓒ임순광
“심심한 날이 없었지.”
이전에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그이의 심심하지 않은 나날들 초창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대학 합격증을 받자마자 선배 따라 강남 아니 강당으로 가고, 강당에서 노래 배우고, 고민이 심화되고, 과대표를 맡고, 세미나에 들어가고, 마당극에 참여하고, 집회에 참석하고. 물 흐르듯 흘러가는 시간이었다.
어느 날은 집회 선두에 섰는데 최루탄이 주변에서 2개나 터졌다. 피를 코로 쏟으며 실려 나갔다.
“얘는 다신 안 나올 거다.”
“얘는 투사가 될 거다.”
피투성이로 사회학과 과방에 누워있던 임순광을 보던 선배들의 뒷말이었다. 임순광은 후자가 됐다.
온갖 모임에 나가고 새벽엔 선동 연습, 저녁엔 세미나, 밤에는 공단 주변에 선전 벽보를 풀칠하러 다녔다.
재개발 철거반대 투쟁, 노동자 파업 투쟁에도 ‘출장’ 나가서 쇠 파이프 화염병 조를 맡았다.
사진 6. 2020년 옆지기 보라 동지와 함께. 지지 응원하며 같은 곳을 바라보는, 이 두 사람을 보라. 어울린다는 표현은 이럴 때 써야 할 듯 ⓒ임순광
성장은 있되 변함은 없는 모습으로 평생을 사는 임순광에게 이제껏 변치 않은 이유를 물었다. 살다 보니 그런 거라 답한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자연스러운 사람이다.
운동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대학교 신입생 시절 마당극의 대본을 외우며 잠꼬대로까지 팔을 흔들며 대사를 읊던 모습 그대로. 앞으로도 임순광은 참으로 열심이고 진실로 진심일 것이다.
글
김우
권리찾기유니온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