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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찾는 사람들] ⑬ 농성장에는 먹이는 노동이 있다 | 칼럼

  • 이종건
  • 2021-07-13 18:04
  • 3,993회

 

먹이는 노동

 

볕이 뜨겁다. 한낮의 농성장과 여름 햇볕 사이에는 얇은 천막이 놓여 있을 뿐이다. 화구에 불을 붙여 큰 들통을 올렸다. 픽픽 쓰러질 것 같은 더위에도 밥은 먹어야지. 아니 먹여야지. 멸치, 다시마 넣고 끓여 우린 육수에 대파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콩나물 무심히 던져 넣는다. 국간장에 멸치액젓으로 맛을 낸다. 가뜩이나 없는 입맛에 텁텁한 국물을 넘길 수 없으니 간은 소금으로 맞추자. 팔팔 끓는 사이 번들거리는 프라이팬에 계란말이 두텁게 구워낸다. 땀이 맺힌다. 한 두 사람 몫이 아니다. 부지런해야 한다. 밥솥은 또 어찌나 큰지, 삼층밥 만들지 않으려면 물 조절도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아이스박스에 미리 준비해둔 오이소박이와 멸치볶음이 든든하다. 여유 부리지 않고 틈틈이 준비해둔 덕이다.    

 

농성장에는 먹이는 노동이 있다. 규모와 사정에 따라 ‘주방’의 유무가 결정되겠지만, 아무튼 누군가를 먹이기 위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게 국수 한 그릇을 말아 내는 것이든, 집 반찬을 싸오는 일이든, 짜장면을 몇 그릇 시켜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이든 ‘배급’의 문제는 농성장의 가장 중요한 화두가 분명하다. 이 일이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면 화두가 아닐 수도 있겠다. 어떤 노동은 묵묵한 것이어서 제 일을 다 하고 있을 때면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그 모든 끼니가 배달 도시락이라고 생각해보라, 그만큼의 일회용품이 한 무더기 쌓이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들어가는 비용은 어찌 감당할까. 투쟁의 일선에 먹이는 노동이 있다. 

 

잘 먹고, 잘 싸우되, 이 노동의 몫이 잘 소화되고 있는지는 늘 고민이다.  

 

 

함께 차려먹는 식사, 인간이 서로에게 관여하는 가장 오래된 방식


철거를 앞둔 어떤 가게에 연대를 할 때, 우리는 거의 삼시세끼를 철문 굳게 닫아 놓은 가게에서 해결해야 했다. ‘알아서 먹겠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하는 말은 크게 의미가 없다. 좁은 공간에서 하루를 보내는 일이다. 서로의 삶에 관여 않고 말끔히 운동만 하는 관계를 희망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먹지 않는 일은 타인의 고민이 되고, 대충 때우는 일은 모두의 걱정을 산다.

 

연대는 결국 서로의 삶에 참견을 하는 일이다. 당신의 고통이 나와 맞닿아있기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끼어드는 일이다. 밥상을 차리고, 나누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이 서로에게 관여하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 밥을 먹는 행위일 것이다. 식재료를 준비하고, 지지고 볶아 그릇에 담아 한 상으로 내기까지 정교하게 분업화된 노동이 필요했다.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는 인간이 서로의 노동을 맞대어 협업으로 한 상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차려진 한 상을 먹는 일은 공동체적 의식이었다. 밥 한 그릇이 피가 되고 살이되어 다시 다음의 노동으로 이어지는 반복적 행위, 그 행위가 중단되는 순간이야말로 공동체의 위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노량진역 육교 위에 마련된 농성장에서 노량신 수산시장 상인들과 노량진수산시장 시민대책위원회에 함께하는 시민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고 있다. ⓒ박김형준

 

 

밥상에 연대하기

 

현대의 인간은 밥을 차리는 일로부터 많이 소외되어 있지만, 농성장에서는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다. 누군가는 나의 끼니를 걱정하고, 삼시세끼 프랜차이즈 음식을 먹는 일을 막기 위해 기꺼이 주방으로 향한다. 그 일이 그렇게 당연하지가 않다. 일면식도 없다가 투쟁을 계기로 만난 나에게 음식을 내어주기 위해 누군가 화구 앞에 서서 음식을 만들고 있다면, 쉽게 몸이 뉘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협업을 하기로 했다. 아마추어들이 남의 주방에 갑자기 투입된다 한들 뚝딱 한 상이 차려지는 것이 아니니, 그릇부터 나르기로 한다. 설거지 당번을 정하기로 했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뒤풀이 종료 신호를 보내는 담당도 정했다. 농성장을 오가는 모든 낯선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 없으니, 비교적 신뢰관계가 쌓인 사람들부터 나서기로 했다. 지금부터는 눈치게임이다. 어지간히 감이 없는 사람도, 이쯤 되면 가만히 있는 것에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불편해서 스리슬쩍 도망가는 사람도 있지만(그건 그것대로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다 먹은 술병이라도 치워볼까 싶어 괜히 빈 병을 들고 이리저리 헤매이기라도 한다. 그 모든 일이 너무 '프로페셔널'하게 자리 잡히기 전에 농성은 끝이 났다. 굳게 닫힌 철문은 사라졌다. 연대인들을 위해 주방에서 노동을 하던 이는 이제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주방노동을 하고 있고, 그릇을 나르고 설거지를 하며 할 일을 찾던 연대인들은 손님이 되어 제 값을 지불하고 음식을 먹는다. 

 

다시 볕이 뜨거운 농성장의 펄펄 끓는 들통 앞으로 간다. 두꺼운 계란말이에 마음이 푸짐하다. 기분 좋은 산미로 맛있게 익은 오이소박이가 입맛을 돋우고, 틈틈이 심심하지 않게 멸치볶음이 자기주장을 한다. 밥은 알맞게 잘 익었고, 콩나물국은 시원하다. 그렇게 한 상을 먹는다. 농성장 밥맛이 왜 이리 좋은지. 맛있게 먹을수록 고민은 깊어만 간다. 잘 먹고, 잘 싸워야지. 헌데 그것으로 충분할까. 반찬 가짓수라도 보탤 겸 어설픈 솜씨를 부려볼까. 다 먹고 죄인처럼 부리나케 천막을 나서지 말고 꿋꿋하게 버텨 설거지에 손이라도 보태볼까. 아, 분명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 다 고민하고 있을텐데. 당번이라도 미리 정해볼걸, 회의를 해볼걸. ‘잘 먹겠습니다.’ 말하기 전에 뭔가 결의라도 해볼걸.

 

나서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


고민은 그만하기로 한다. 

 

 

글·사진

이종건

권리찾기유니온 조합원/옥바라지선교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