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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어떤 특권에 대하여 차별표현을 부인하는 특권 | 칼럼

  • 명숙
  • 2020-08-31 12:19
  • 2,107회

흔히 ‘특권’이라고 하면 흔히 몇몇 권력자들에게만 해당하는 단어라 생각한다. 고위직 공무원이나 국회의원 같은 정치인, 재산이 많은 사업주나 재벌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라고 여기기 쉽다. ‘면책특권’처럼 법에 국회의원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권리가 명시된 경우도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 월급을 받고 생활하는 대다수 직장인들은 자신은 특권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일상은 매우 다층적인 권력(억압)이 만들어낸 차별구조 속에 펼쳐진다. 특권은 다층적인 차별과 억압의 구조에서 발생하는 것이므로 단지 부나 정치권력을 과독점하고 있는 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다. 주류에 속한 사람들에게만 권리가 주어진다면 그것은 특권이 된다. 한 사람이 어떤 성별인가, 어떤 문화와 어떤 몸과 어떤 성적 지향과 어떤 국적을 가졌는가에 따라 다르게 대우하는 것이 차별이다. 주류적인 문화와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집단)은 고려하지 않는 제도와 문화, 관행이 누군가의 권리를 당연하게 배제하는 것이 차별이다. 어쩌면 한 번도 차별을 경험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본인이 특권적 위치에 있음을 어렴풋이 드러내는 것일 수 있다.

 

 

[사진] 지난 7월1일 장애등급제 가짜폐지 1년 규탄 결의대회를 마치고 행진하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 ©전장연

 

 

비장애인을 기본값으로 한 차별의 감각

 

얼마 전 정의당 장혜영 국회의원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나온 ‘절름발이 정책’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더불어민주당 이광재 의원에게 장애인비하 용어라고 지적하자 논란이 일었다. 이 의원의 정치적 지지자들은 장 의원의 지적에 대해 ‘흔히 쓰는 비유’, ‘괜한 트집’이라며 오히려 장 의원을 비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절름발이’라는 단어는 ‘낮잡아 이르는 표현’이라고 설명돼있듯 비하의 뜻을 담고 있다. 장애계도 ‘절름발이는 명백한 혐오 표현’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비장애인들은 비유처럼 사용하여 비하임을 느끼지 못한다고 차별표현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사용하는 단어인 ‘귀머거리, 벙어리, 장님, 난쟁이, 소경, X신’ 등은 장애인을 비하하고 차별하는 단어다. 비장애인을 기본값(표준)으로 생각해서 사용하는 차별적인 표현과 비유가 많다 보니 공기처럼 존재하지만 존재한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가. 

 

언어는 사회를 닮는다.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차별적인 표현이나 언어가 넘쳐나고 대다수 사람들이 반차별 감수성을 이에 비례해서 떨어진다. 한국 사회는 과거에 비해 차별이 완화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큰 문제다. 20세기에 코미디프로에서 지적장애인이나 성소수자를 흉내 내며 비하하는 콩트나 개그가 넘쳐났다. 아니 최근까지도 넘쳤다. 그런데 선출직 정치인인 국회의원이 장애인 비하표현을 쓰면 별일 아닌 것처럼 생각되니 부정적 영향력은 클 수밖에 없다. 장의원이 “국민에게 모범을 보이는 국회가 될 수 있도록 앞으로 그러한 소수자를 비하하는 표현들은 조심해서 사용해 주시면 좋겠다”라며 자제를 요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차별적인 비유를 쓸 수 있는 특권  

 

초기 장 의원을 비난했던 사람들이 말한 ‘흔히 쓰는 비유’란 비장애인의 위치에서 감지하지 못하는 장애인차별에 대한 인식이다. 장애인 당사자가 느끼는 차별에 대해 ‘그건 비유야, 그러니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마’라고 한다고 해서 당사자가 느끼는 불쾌함과 불편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어쩌면 이 또한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에서 비주류인 장애인의 의견과 느낌마저도 부인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물론 과거에는 훨씬 더 많이 장애인 차별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지금은 그러한 표현이 줄어들었고 초중고에서도 차별 표현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사회다. 그런데 하물며 선출직 정치인이 이에 대해 무지하다고 그냥 넘어가면 안 될 일이다. 필자도 주류의 위치에 속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무심코 차별적인 용어를 사용할 뻔한 적이 몇 번이나 있다. 누군가 이를 바로 알아차리고 지적해주면 사과하고 시정하면 된다. 그런데도 ‘의도’와 ‘비유’, ‘습관’이란 핑계로 차별표현이라는 지적을 수용하지 않고 개선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차별을 부인하는’ 특권이 아닐까. 자신이 주류에 속함으로써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 ‘언어검열’ 운운하며 정당한 지적조차 수용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 차별의 문화는 지속될 것이다.   

 


과거를 재평가하고 평등한 언어와 문화 만들기

 

한 사회의 평등감수성이 높아지면 그에 따라 언어나 문화도 바뀐다. 과거에 입버릇처럼 쓰던 ‘여편네’나 ‘유모차’, ‘주부’란 말도 이제는 성차별적 표현으로 인정되고 있다. 효율성의 논리로 이미 굳어진 단어를 굳이 고칠 필요가 있냐고 할 수도 있으나 성평등인식이 높아지면서 차별적 표현에 대한 불편한 느낌도 함께 상승하는 것이다. ‘여편네’는 아내를 낮잡아 이르는 비하를. 유모차는 아이는 엄마가 돌봐야 한다는 성차별적인 성역할 고정관념을 바탕으로 한 단어다. ‘주부(主婦)’도 집안 살림은 아내, 여성이라는 생각으로 ‘아내 부(婦)’를 사용한 것으로 성차별 사회에서 탄생한 단어다. 대안으로 유모차는 유아차로, 주부는 살림꾼으로 바꾸어 쓴다. 

 

물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단어들이 차별이 바탕이 된 단어임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더 차별임을 알리고 평등한 용어로 바꾸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언어는 인식을 바꾸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유럽연합(EU)도 여성의 결혼 여부를 드러나게 하는 ‘미스(Miss)’와 ‘미시즈(Mrs)’의 사용을 금지했다. 프랑스에서는 같은 취지로 ‘마담’과 ‘마드모아젤’을, 독일에서는 ‘프라우’와 ‘프로일라인’, 스페인에서는 ‘세뇨라’와 ‘세뇨리타’의 사용을 금한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차별을 시정하려는 노력은 단지 단어에만 그치지 않는다. 얼마 전 미국에서 경찰폭력으로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 사건 이후 전 세계적으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와 운동이 퍼져나갔다. 이 운동은 기존의 차별적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재인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과거의 미국 문화 속에서 인종차별적인 역사를 없애는 시도도 있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의 문화가 담겨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미국 스트리밍 서비스 HBO에서 삭제한 것이다.   

 

물론 그동안 한국에서도 차별적인 언어를 바꾸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8년 서울시에서 차별적 의미가 있는 기존 행정 용어 13개를 고치겠다고 발표한 것도 대표적인 사례다. 장애인과 대비하는 의미로 ‘정상인’이라는 단어도 대상이었다. 장애가 없으면 정상인, 장애가 있으면 비정상인이라는 느낌을 주어, 장애가 비정상이라는 그릇된 사회적 인식을 심어줄 수 있기에 ‘비장애인’으로 쓰기로 한 것이다. 그 외에도 ‘학부형(學父兄)’, ‘결손가정’, ‘불우이웃’, ‘조선족’ 등의 단어도 시정 단어이다. 학부형은 ‘학생의 아버지나 형으로 학생의 보호자를 이르는 말’로, 여성을 학생의 보호자에서 배제하고 있다. ‘결손 가정’은 부부중심의 가족이 정상이라는 생각으로 그렇지 않은 가족을 결핍된 것으로 보는 차별의 시선이 있다. ‘조선족’은 미국이나 일본에 사는 같은 민족은 각각 ‘재미 동포’ ‘재일 동포’라고 부르는데 반해 중국만 유독 조선족이라고 부르는 것이므로 차별이다. ‘학부모’, ‘한부모가족 또는 조손가족’, ‘어려운 이웃’, ‘중국동포’로 시정하기로 했다.  

 

 

차별을 인식하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민간영역이나 공공영역에서 차별 표현을 시정하려는 노력이 있음에도 여전히 국회의원 같은 고위직 정치인들의 장애인비하 발언은 종종 발생한다. 이렇듯 차별을 시정하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 몰라서 또는 습관이라고 그냥 넘어가는 일이 많아서다. 개인에게도 익숙했던 차별 표현과 결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때로는 까다로운 사람으로 취급되기 십상이다.

 

차별표현을 쓰다가 누군가에게 지적을 받으면 무안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변화를 위해 노력한다면 개개인의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차별 표현이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누가 놀림의 대상이 되거나 삭제되는지를 살펴볼 때 우리가 알게 되는 세상은 넓어질 수 있다. 과거에 습관처럼 사용했던 조선족이나 유모차만 봐도 그렇다. 원뜻을 생각하기 전에는 몰랐던 이면의 세계, 습관처럼 배웠던 말 뒤에 자리한 차별의 구조를 알게 된다. 물론 위의 예처럼 몰라서 안 쓰는 것이 아니라 차별표현이라도 개의치 않고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차별받고 있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문제는 나와는 관련이 없다고 여길 때 그의 세상은 장벽에 갇혀 좁아질 뿐이다. 이제 우리의 행동이 넓은 세상으로 갈지는 우리의 몫이다. 

 

 

명숙

권유하다 편집위원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