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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도 행복길

  • iron
  • 2020-05-11 16:11
  • 4,739회

두 달에 한 번씩 두레생산자회 소식지에 생산자 인터뷰 글을 싣고 있다. 얼마 전엔 화천 생산자를 만나러 다녀왔다

생협의 핵심은 관계. 두레생협연합회와 그 소속인 울림두레생협 활동을 하며 생산자들과 관계를 다져왔다. 임기를 마치고도 돈독한 친분 속에 여러 생산자를 만나고 있고 그이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소식지에 담아내고 있다.

 

아직도 회자하는 이야기가 있다. 내가 맡은 노릇의 임기를 마치며 연합회 회장단과 생산자회 이사분들을 우리집으로 청했다. 전국에서 오시니 대접에 부족함이 없도록 무엇보다 술의 수량에 신경을 썼다

해창 막걸리 61상자, 91상자, 121상자씩을 주문해 준비했다. 낮은 도수부터 한 병씩 비워나갔다. 거기에 방문객이 들고 온 돌배주, 아까시주까지 곁들이니 12도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할 즈음부터 전사자가 속출했다.

 

누구는 토하고, 누구는 뻗어서 자고, 대개는 앉은 자리에서 졸았다. 근처 사는 이가 늦게 합류해서 그 사진을 찍었다. 상을 사이에 두고 둥그렇게 앉아 하나같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걸 내려 찍은영화 속 한 컷 같은 장면이다. 이후 생산자분들은 다른 장소 같은 모습 패러디 사진을 정겹게 연출해 보내주시기도 한다

 

한번은 제주에서 생산자회 모임이 있었다. 하루 먼저 내려갔던 사람들과 공항에서 생산자회 분들을 맞이했다. 나는 ‘러브 액츄얼리라는 영화 속 유명한 스케치북 고백 장면의 본을 땄다. 스케치북에 그림 그리고 글씨를 써서 한 장 한 장 넘기며 환영의 마음을 전했다. 너무들 좋아하셨다.

가짜로 그런 척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라면 그 마음은 전달되어 또 다른 마음을 적시고 물들이기 마련이다. 짧지 않은 시간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쌓이면 그게 또 눈에 밟히는 관계가 된다.

 

화천의 생산자는 산 중턱에 살았다. 길이 닦이지 않은 곳을 트럭으로 갈아타고 오르자니 몇 년 전 바이칼호를 보러 갔을 때 생각이 났다. 알혼섬에서 우아직이라는 사륜구동차를 타고 차에서 흘러나오는 현지 민요에 맞추어 춤을 춘 적이 있다. 실제로 춤을 춘 게 아니라 울퉁불퉁한 길에 절로 엉덩이가 들썩이고 몸이 좌우로 흔들려 춤을 추는 느낌이었단 말이다.

 

그렇게 흔들흔들 오르는 산길. 마침 내가 좋아하는 복사꽃이 돌배꽃과 조팝꽃과 더불어 만개한 봄 산이었다. 새들은 우짖어쌓고 꿀 향기로 맡아지는 봄 내음이라니. 눈으로 귀로 코로 호사하는 기분이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집. 생태뒷간에서 똥과 오줌을 받아서 거름으로 사용하는 집. 복사꽃잎 흩어지고, 앵초가 피고, 토끼풀이 자란 마당 툇마루에 앉아 인터뷰를 마쳤다.

 

저녁은 두레축산 생산자분이 새로 지은 집으로 초대해 준비해 주셨다. 직접 생산한 아스파라거스, 더덕의 맛은 내가 먹어본 것 중의 최고였다. 전에 단감 생산지에서 갓 딴 감을 한 입 먹고 아 이렇게 달아서 단감이라고 부르는구나.’ 싶던 산지의 맛.

두레 한우가 메인인 상차림. 강원 유기농의 생산자분은 내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부러 생선회와 해산물을 포장해서 찾아와주셨다

 

끊임없이 나오는 술과 맛난 안주와 좋은 사람 이렇게 삼박자를 갖춘 시간은 밤으로 무르익어 갔다

그런데도 나는 다음날 노동절 행사를 고려해서 불굴의 의지로 2차를 가지 않았다. 난 내가 나인 게 좋아서 행복한 사람인데, 이럴 때면 자신을 대견해하기도 한다.

 

바쁜 척살아가는 터라 사무총장님이 일정 잡느라 애쓰셨는데 앞으론 매월 중순 주말쯤으로 날짜를 고정해서 다니기로 했다. 6월 예정지는 홍성이다

빚은 많지만, 땅심을 키우는 신념으로 빛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불원천리. 멀어도 고생길이 아니고, 만나기 전부터 웃음 베어 물고 찾아가는 행복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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