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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부부와 삼봉이를 생각하다

  • iron
  • 2020-05-07 18:50
  • 4,507회

어제 약속 장소에 30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나는 이럴 경우 먼저 먹는다. 목 빼고 기다리는 거보다 나중에 오는 사람이 편할 거로 생각해서다. 25도 화요 한 병을 시켜 서너 잔 마시다가 만나기로 한 사람이 술꾼이니 한 병을 따로 시켜놓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에게 반갑게 술부터 따라주며 오늘은 각 1병씩만 마시자고 제안했다. 근데 췌장염이 와서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지인은 천천히 아껴가며 두어 잔 마시고, 예상치 못하게 내가 다아~ 마시는 상황이 됐다.

 

귀가하며 씨실에 들렀다. 공동체 주택에 사는데 아무라도 무어라도 건수를 만들어 공용 공간인 씨실에서 번개가 잦다. 이번엔 누가 두릅을 사 왔다고 데쳐서 막걸리랑 먹자는 번개였다. 이미 취한 마당에 막걸리까지 받아 마시니 필름이 끊겼다

 

난 많이 취하면 깔깔깔 웃는다. 평상시 소리 내어 웃는 일이 드문데 술에 취하면 안에 저축했던 웃음이 터져 나오는 듯하다. 씨실에서 나눈 얘기가 남은 건 없고 취해서 웃은 것만 기억에 남았다.

 

필름 끊긴 뒤 스스로 놀랐던 적이 있다. 한 번은 결혼 전 방송작가교육원이란 곳에서 수업을 받던 시절이다. 글을 써보자고 스터디 모임을 꾸렸는데 글은 한 줄도 안 쓰고 죽이 맞아 술만 마셨다. 택시 탈 돈을 아껴서 첫차가 다닐 때까지 마시곤 했는데, 날이 새기도 전에 술 마실 돈이 떨어지면 다른 이를 불러내기도 했다. 이날은 좀 다른 방법을 찾았다.

 

이 근처에 내가 아는 신혼부부가 사는데.”

 

가자~!”

 

누군가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했는데 우리는 충분히 취해 있었다. 신혼부부의 옥탑방에 자정도 넘은 시간에 흔쾌히 들이닥쳤다. 새벽 내 웃고 떠들고 마시다가 한두 시간만 자고 일어서기로 했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네요. 이제 그만 가볼게요.”

 

한두 시간 자고 일어나 본래대로 정중하고 깍듯해진 나를 바라보던 부부. 경악까지는 아니지만,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신랑은 입을 쩌억 벌리고 신부는 눈을 동그랗게 떴던가.

빨간 얼굴로 왔다가 하얘진 얼굴색보다 정색이 낯설었겠다. 왠지 서운해하는 눈치였던 이유는 끊긴 필름이 부분 부분 재생이 되고 이해가 됐다.

 

자던 사람 술 사 오라 등 떠밀고, 어서 안주를 차려내라고 상까지 두드리며 당당하게 요구하던 내 모습이 생각났다. 함께 술을 마시며 술기운이 다리를 놓아 금세 막역한 사이처럼 말을 놓는 친구가 됐던 것도 떠올랐다. 눈 붙이고 난 뒤의 커다란 간극. 모든 게 '가위로 오려낸 것처럼 다 지난 일이야.'가 됐으니 얼마나 허망했을까.

 

또 한 번은 결혼 후 부산영화제에 갔을 때다. 다른 친구들은 춤을 추러 나가서 나 혼자 술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 남자가 오더니 허락도 없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내 테이블에 있는 안주까지 자연스레 집어 먹으며 춤추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무례함에 어이가 없었다. 내 일행이 돌아와 그 사람과 인사를 하는 틈에 끼어들었다.

 

저 처음 뵙는데 인사드릴게요.”

 

,  나 삼봉이야.”

 

어제 술자리에서 블루스까지 췄다는 설명을 들으니 슬로우 비디오처럼 필름이 재생됐다. 퀴어영화제 사무국 친구들과 함께 가서 게이인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전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제껏 만나본 게이 친구들은 일반 남성들보다 부드럽고 자상하다. 나는 경계를 해제한 나머지 함께 춤을 추고 기억도 못 할 지경이었던 거다. 삼봉이가 내 옆에 앉을 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얼굴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천천히 눈을 감고 다시 생각해 보는 거야.’ 필름이 끊겨 잊힌 시간을 재생하는 건 상대와 내 소중한 시간에 대한 예의이기도 한 듯하다. 또한 사라진 시간을 소생해야 삶의 갱생도 따르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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