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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계획은 있다

  • iron
  • 2020-05-04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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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유형 테스트 같은 걸 해보면 나는. 생존지수가 낮다. 미리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대비하는 마음이 없는 게 드러난다. 사람들은 노후 설계와 노후 자금 이런 걸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비록 적금도 연금도 보험도 들지 않은 것에 맞춤하게 통장 잔고도 없을망정 내게도 노후를 준비하고 있는 게 있다.

일단 고기를 끊은 지 십몇 년 됐다. 나중에도 고깃값이 들지 않을 거다. 머리를 물로만 감은지도 2년이 넘었다. 그러니 샴푸값도 절약. 허리가 아파서 코어근육을 강화하려고 운동을 시작한 지도 2년이 됐으니 돈 대신 근육과 건강을 저축씩이나 하고 있는 거다.

 

게다가 아버지가 몇 년 전에 태백에 있는 땅을 물려주셨다. 대책 없는 낙관과 근거 없는 자신감만으로 살아가는 내가 걱정되셨나 보다. 땅을 팔아서 빚을 갚겠다고 했더니 돈은 되지 않는 땅이라 일러 주셨다. 참으로 진실이었다. 땅의 공시지가는 평당 300원 정도였다. 나중에 고랭지 배추농사라도 지어 입에 풀칠하라는 말씀이셨다.

 

작년에 친구들과 내 땅을 보러 태백에 갔다. 땅의 절반 정도는 잣나무 울창한 산으로 이어진다. 옆 땅과는 담을 쌓을 필요도 없이 계곡물이 잔잔히 흐른다. 개발과는 거리가 멀고 근처에 자연 휴양림도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돈이 되진 않지만, 산도 좋고 물도 좋으니 그것으로 됐다. 거기에 동네 이름이 철암동으로 예전 이름은 금광골이니 살면서 매일 한 숟갈씩 땅을 파다 보면 번쩍번쩍 누런 금을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옆에서 버섯농사를 짓는 주민 말로는 몇 년 전에 온천 개발 이야기가 돌면서 많은 외지인이 근처 땅을 샀다고 한다. 온천의 발원지이기는 한데 수온이 허가치보다 2도 정도 낮아서 온천 개발은 물건너갔단다.

나는 집에서 샤워하는 거보다 대중탕에서 따듯한 물에 들어갔다가 찬물에 담갔다 하는, ‘78을 즐기는데 마침 잘 됐다. 집에서 수도꼭지만 틀면 온천수가 나온다는 얘기 아닌가. 돈이 되지 않는 땅을 팔아 따듯한 남쪽에 다시 땅을 사긴 어려울 듯하니 나중에 살 곳으로 태백을 낙점한다.

 

사실 내겐 오랜 노년의 꿈이 있다. 풍광 좋은 곳에서 글을 쓰며 늙어가고 싶다는 꿈이다. 앞집, 뒷집, 옆집엔 내 좋은 벗들이 도란도란 함께 살아간다는 게 벗들의 동의 없는, 또 내 멋대로의 계획이다.

 

아주 작은 단층의 집을 짓고 토방에 낮은 꽃담을 둘러 지나는 이들과 나무의 꽃과 열매를 나눈다. 툇마루에 앉아 섬돌에 발을 얹고 볕 좋은 날 해바라기를 한다. 대문으론 제주의 정낭 같이 나무 하나 걸쳐놓고 들어와라, 혹은 혼자 있고 싶다는 내 뜻을 전한다. 놀러 오라는 뜻이 없거나 집에 사람이 없을 때 들른 친구는 전하려던, 갓 캐낸 남새 한 단을 토방에 던져주고 가면 그만이겠다.

 

내 먹을 것을 생태뒷간에 모은 내 똥과 오줌으로 길러낸다. 뒷간엔 큰 창을 내서 어느 비싼 명화보다 멋질 뒷산의 풍경을 들인다. 내가 심고 가꾸며 풀 뽑는 텃밭 농사보다 매력적인 건 산과 들에 지천으로 나서 자라는 풀을 먹는 것이겠다. 마침 집 뒤가 산이요, 집 앞이 들일 터다. 어느 시기에 어느 부위를 먹을지, 어떻게 갈무리할지만 공부하면 생명력 강한 푸성귀, 산야초와 함께하는 삶은 소박하면서도 풍성할 거다.

 

내게 술시는 고정의 오후 7~9시가 아니다. 철에 따라 바뀌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술 생각이 나는 시간이 바로 술시다. 어린 왕자가 작은, 자신의 별에서 의자 위치를 바꾸어 몇 번이고 석양을 보는 게 부러웠다. 나도 첫사랑의 눈동자처럼 볼 때마다 가슴 뛰는 붉은 해를 매일 마주하고 싶다. 낙조를 배경으로 토방에 동그랗게 모여앉아, 빚은 술과 담근 술을 스윽슥 무쳐낸 겉절이에 곁들여 마시는 상상까지가 내 꿈의 마무리다.

 

개인적으로 보험을 드는 것보다 모두를 위한 사회로 바꾸는 게 확실한 보험이라 생각하며. 혼자만 행복한 삶이 아니라 우리가 행복한 삶을 설계하는 삶을 살아보겠다.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 곁에서 사회적 부채감을 조금 덜어내면 그렇게 태백으로 가겠다

남으로 창을 내고 왜 사냐 건 웃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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