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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

  • iron
  • 2020-04-13 16:45
  • 4,558회

일요일인 어제. 친구 아버지상 조문하러 원주에 다녀왔다. 원주에 숱하게 다녔지만 초월터널이란 이름을 처음 보았다

영화 수상한 그녀를 떠올렸다. 나문희가 청춘 사진관에 들어가 사진을 찍었더니 심은경이 돼서 나오던 영화. 젊은 날의 자신으로 회춘한 거다. 마지막 장면에선 박인환이 같은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은 뒤 김수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초월터널을 빠져나와 그 끝에선 시공간을 초월한 시간여행자로, 원주의 학교에 입학하던 19살로 돌아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정신과 마음은 그대로면서 몸만 젊어진다면 짱이겠다. 몸은 슈슈슈슉 배도 들어가 짱짱해지고. 얼굴은 박근혜처럼 필러 맞지 않아도 팔자 주름, 슬픈 주름 다 없어져 팽팽해지고. 아픈 왼쪽 어깨도 쌩쌩해지고 말이다

 

음 물론 터널 끝 변신은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신촌의 한 장례식장에 들러 후배 어머니상 조문을 하고, 한 시간여 집에 들러 빠르게 설거지를 하고 다시 나왔다. 자정 무렵 만나기로 한 약속이 있어서였다.

 

동기 두 명이 술집을 운영해서 하루 영업 다 끝나고 월요일 새벽에 만나곤 했다

여름에 마감하고 돈 통에서 들고 온 천 원, 오천 원 지폐를 활짝 펴서 부채질해주기도 하던 친구들. 값이 싸고 양이 많은 돼지고깃집을 하며 칼질에 상처 입은 작은 흉터들이 가득한 손으로 부쳐주던, 귀한 돈부채였다.

 

한 친구는 고깃집 외에도 내가 사는 집 근처인 망원동에서 술집을 운영해서 좀 더 자주 봤었는데 작년인가 알바하는 친구에게 물려주었다

얼마 전 야식 생각이 나던 새벽에 친구에게 톡을 했었다. ‘니가 해주던 해물떡볶이 먹고 싶다.’라고.

 

그 떡볶이를 먹으려는 만남이었다. 근데 막상 술집에 가서는 주인이 바뀌었는데 주방에 들어가 직접 하는 건 아무래도 실례일 듯해서 친구를 말렸다

친구의 레시피를 물려받았다는 주인장의 요리로 먹었다. 우리는 해물떡볶이에 멍게만 주문했을 뿐인데 주꾸미볶음이며 홍합탕을 서비스로 줘서 배가 불렀다

 

술집 주인에게 은혜를 갚는 일은 술을 많이 시키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또 많이 마셨다. 술을 마시고 싶어서라기보다 보은하기 위해서였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친구에게 권리찾기유니온 권유하다회원가입도 권유했다. 흔쾌히 받아들였다다음엔 가입서를 전하러 친구가 운영하는 돼지고깃집으로 찾아가기로 했다. 술을 마시고 싶어서라기보다 뽕도 따고 알도 먹듯 가입서를 받기 위해서라고 역시 진심으로 생각한다.

 

남녀 사이에 우정은 없다고 말하는 드라마 대사도 있던데. 아니다. 그럼 내 오랜 남자친구들은 다 뭐가 되나 말이다

술집을 운영하는 동기 두 명 외 선배 한 명도 술집을 한다

내가 활동가가 돼서 활동비로 내 생계를 책임지겠다고 결심한 뒤 제일 먼저 걱정한 것은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가 아니었다. ‘그럼 술은 무슨 돈으로 마시지?’였다

세 사람 다 평생 언제든 공짜술을 주기로 약속했다. 세 사람이 망하지 않고 길게 장사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소망처럼 시간여행을 해서 젊은 날로 돌아가진 못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가 되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바로 이렇게 학교 때 친구와 선후배를 만나 우리의 빛나던 날들을 얘기하는 거다. '그래, 그런 맑고 화려한 날들이 있었지.' 하면서 내일을 살아갈 힘을 또 얻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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