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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에서 몸을 일으키다

  • iron
  • 2020-03-31 15:53
  • 5,041회

술 이야기를 안 하면 술이 서운할 거 같아서. 오늘은 술에 관한 이야기다.

 

아버지도 엄마도 술을 못 마셨다. 아버지가 술 한 모금 마시는 걸 본 적이 없다. 대학 신입생 때 막걸리를 마시고 호흡이 가빠져서 응급실에 갔다가 알코올 분해 효소가 없다는 얘길 들었다고 한다. 아버지 대학 때 일기장을 봤는데 오늘은 맥주 2잔을 마시고 만취해 돌아왔다.’ 뭐 이런 구절도 있었다

아버지는 이른바 술 냄새만 맡아도 핏줄이 불거지는 체질. 엄마는 맥주 반 잔만 마셔도 노래가 절로 나온다고 자평하는, 저렴하게 취하는 타입.

 

그런 유전자를 물려받은 내가, 알코올계의 흙수저인 내가 여느 사람처럼 술을 마시는 건 노력!의 결과라는 얘기를 하고 싶다

누구는 아버지가 반주하며 소주 2병은 거뜬히 비운다는 성골, 진골의 가계를 얘기하지만. 나는 스스로 몸을 일으킨, ‘개천에서 용 났다.’ 케이스라는 얘기를 하는 거다.

 

대학을 지방으로 가게 됐다. 친구들이 걱정했다. 주량을 알고 가는 게 안전할 거라고 함께 주점에 갔다. 곤장을 맞을 때 한 대요, 두 대요 외치듯 내가 마시면 친구들이 한 잔이요, 두 잔이요 헤아렸다

이야기도 나누고 안주도 먹어가며 천천히 마시는 게 아니라 연거푸 마시는 잔 수가 주량인 줄 알고 그렇게 했다.

 

마시다 화장실을 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늦었다. 걸음걸음 토했다. 그렇게 첫날부터 토하기 시작했다

호랑이와 곰이 동굴에서 마늘과 쑥을 먹을 때도 그 기간은 정해져 있었다. 한데 내가 술을 마시며 토하는 나날에는 언제까지라는 기약조차 없었다

게다가 어느 날은 입으로만 토하는 게 아니라 코로도 뿜듯이 토해야 했다. 눈물이 났고 죽을 만큼 괴로웠다. ‘고춧가루 고문이 이런 거겠구나.’ 간접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여름방학에야 술 마신 딸을 처음 본 엄마는 식중독인 줄 알고 응급실에 데려가려 했다. 나와 같은 전신 반점의 증상을 보이는 사람을 한 명 본 적이 있다. 바로 내 동생이다. 체질이라는 반증이다

몸에서 안 받는 술을 마시고. 변기에 토하곤 말끔히 세수하고 나와서 다시 마시는 세월. 2년이 되자 전신 반점 대신 다른 사람들처럼 얼굴이 붉어지는 정도로 변했고, 토하는 일이 사라졌고, 그저 웃다가 필름 끊기는 버릇만 남았다.

 

몸에서 받지 않는 걸 왜. 중단하지 않고 마셨을까. 아마 중학교 때 존경한 국어 선생님에게 마음으로 한 약속 때문 아니었을까. 국어 선생님이란 직함에 걸맞게 늘 시를 칠판에 적어주시던 선생님. 알코올 중독의 몸에 담긴 그 맑은 영혼. 

내가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꼭 술을 마셔서 선생님을 이해해야지.’ 했던 열세 살의 다짐을 지키고 싶었던 때문 아니었을까.

 

물론 잘 마신다는 부추김에 더 마셨고, 여성은 대개 자정이 되기 전 술자리 중간에 일어서니 오기로 더 마셨고, 웃고 장난치며 쾌활한 이완의 시간을 즐기느라 줄기차게 마시기도 했다.

 

2020년 술자리를 월 15일 안팎으로 줄였다. 낮에 카페에서 모임이 잡히면 차를 마시는 게 아까워서 난 맥주 1~” 하는 식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제껏 맞지도 않은 술을 받아주며 별 탈 없이 있어 준 것에 고마워하며 몸을 조금 아껴주는 마음을 내려는 거다. 그래야 몸도 술도 좋은 친구로 내내 함께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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