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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에게 묻다

  • iron
  • 2020-03-25 15:59
  • 4,810회

그냥 어릴 적 이야기가 하고 싶다. 아마 오늘 머리가 복잡해서일 거다. 어린 날의 나인 네가 오늘의 나를 위로해 줬으면 좋겠다.

 

집을 지켰다. 아빠는 출근하고, 엄마는 마실 가고, 오빠와 동생은 놀러 나가면 그럼 소는 누가 키우지?가 아니라 그럼 집은 누가 지키지?'였다. 

시골의 대문은 늘 열려 있었다. 아이들은 우르르 앞문으로 들어와 마당을 거쳐 뒷문을 열고 나가기도 했다. 그게 지름길이라서 그랬다. 그러니 지킨다는 게 뭐 의미가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지구는 독수리 오형제가, 우리 집은 내가 명목상 지켰다.

 

빈집에서 하는 일은 생각하는 거였다. 안방이 꽤 넓었다. 어린 나이니 더 넓게 느꼈을 거다. 누워서 천천히 굴렀다. 맞은편 벽에 닿으면 다시 굴러 돌아왔다. 그러면서 생각하고 상상하고 꿈꿨다.

 

또 다른 일은 혼자 하는 소꿉놀이였다. 깨진 토분을 갈아 고춧가루도 만들고, 흙에 물을 부어 밥도 짓고. 금비, 은비, 실비라는 가상의 인물을 세워 놀았다. 돌멩이를 들추면 쥐며느리나 땅강아지가 나와서 친구가 돼주었다.

 

또 즐겨하는 일은 세워놓은 자전거 바퀴를 돌리는 거였다. 챠르르 돌아가는 소리가 예뻤다. 빠르게 돌다가 속도가 늦춰지며 멈춰지면 다시 돌렸다.

바퀴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어린아이가 무슨 깊이 있는 생각을 했을까마는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몰입이었다. 돌리다 보면 여기서 바퀴를 반짝이게 하던 햇볕이 어느덧 자리를 움직여 저기서 비추고 있었다. 

 

비가 오면 마루에 앉아 웅덩이에 보석 같은 파문을 일으키는 빗방울을 하염없이 보았고, 기어 나온 달팽이의 천천히 가는 걸음을 내내 지켜보았다. 배추벌레의 이동처럼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걸음이었다.

 

조금 커서 글자를 알고 책을 읽을 수 있을 땐 책이 또 내 친구가 되었다. 동네 단짝인 친구는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내가 책을 읽고 있으면. “어, 잠깐만.”이라고 말하고 다시 책에 코를 박으면. 기다리다가 언제 갔는지 모르게 소리도 내지 않고 문을 닫고 사라지는 우정을 발휘했다. 그 잠깐만이 한참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아니라 아니까 친구다.’

 

동네에 오빠랑 동갑인 오빠가 있었는데. 그 집 할머니가 나를 며느리 삼겠다고 노상 말씀하셔서 왠지 부담스러웠다. 근데 그 집 마루엔 '소년동아' 같은 두꺼운 만화책이 주르륵 꽂혀있는 책꽂이가 있었다. 그 집에 가끔 놀러 갔다.

그 집 아줌마가 해일이 없는데.” 말씀하시곤 했다. 죄스러웠다. 없는 걸 알고 갔기 때문이다. 해일이 오빠는 방금 우리 집에 와서 우리 오빠랑 놀러 나간 걸 알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니라 만화책 때문에 한 발걸음이었다. “들어와서 기다려라.” 말씀하시면 마루에 올라가 해가 져서 그 집 오빠가 집에 돌아오기 전까지 만화책을 봤다.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오기 전 돌아가는 방문이었다.

 

혼자 놀기의 진수라는 게 있다면 나는 일찌감치 터득했다. 물론 친구들도 많다. 지금도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는 시간이 두 번째로 좋다. 제일 좋아하는 건 역시나 혼자 있는 거다. 내 방 침대에 누워 생각하고 자고 읽고 보고 그러는 거다. 비가 오는 날 불을 끈 어둑한 방 안에 누워있기는 언제나 정답.

 

동네에서 착한 아이로 칭송받으며 자라던 아이. 싫다는 표현 못 하고 말 잘 듣던 아이. 하지만 고집이 세서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매를 덜 맞으려는 방어로도 거짓말을 하지 않던 아이. 너를 떠올려보자니 너는 이미 나에게 알려 주었다.

그래 옳다고 생각하는 걸 하자.

 

 

댓글목록

iron님의 댓글

iron 작성일

며칠 전 병원에서 어깨 추나치료후 온열기를 쬐는동안. 오른손으로 왼손을 다정하게 잡아줬어요. 내가 나를 위안해주는 느낌. 이런 느낌 다른 이에게도 '권유하다.'^^

나리님의 댓글의 댓글

나리 작성일

'아니까 친구다'라는 말 너무 좋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