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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으로 기다리기

  • iron
  • 2020-03-24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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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이다. 코로나19로 행사나 모임이 연기되고 있지만, 일요일에 냉이를 캐러 가기로 했다. 냉이라고 부르면 봄 햇볕이 느껴지고, 달래라고 발음하면 봄 향기가 맡아진다. 사실 냉이는 구실이고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 나누려는 거다. 사무실에서 만나자는 것보다 텃밭에서 냉이 캐며 만나자는 말에서부터 설레며 기다리기에 충분조건이 된다.

 

아는 이의 텃밭에 냉이가 한창이란다. 산도 보이고 들도 보이는 곳이 그려진다. 빌딩으로 막히지 않고 탁 트인 곳에 서면 봄볕이 머리를 쓰다듬고 봄바람이 머리카락을 넘겨주겠지. 냉이를 캐다 보면 흙냄새도 맡아지겠고. 고랑 사이를 걸어 다니면 마른 땅에 흙먼지도 폴폴 나지 않으려나.

 

텃밭 나들이의 하이라이트는 무엇보다 새참. 맛난 새참을 준비해 모이자고 했으니 각자 가방에서 깜짝 놀랄 먹거리를 풀어놓겠지. 누구는 김밥과 과일이라 확정해 알렸지만, 요리의 대가인 다른 이들은 또 무얼 가져오려나.

 

생각하다 보니 농활 기억도 떠오른다. 논에 들어갔는데 거머리를 만났다. 떼어내서 논둑으로 던져버렸는데 피 냄새를 맡고 여러 마리가 달라붙었다. 떼어내 던져도 어느새 또 다른 놈이 붙어있고. 거머리 떼에 쫓기다 보니 본의 아니게 속도전이 됐다

밭일할 때도 쉼 없이 하니까 다른 이들보다 앞서갔다. 평소 느리니까 뒤처지지 않으려는 마음이 그렇게 나를 앞으로 이끌었다

또 체구가 작으니까 덩치 큰 친구들에 뒤지지 않으려고 짚단을 나를 땐 하나만 들지 않고 양쪽 옆구리에 끼고 날랐다. 암튼 최선을 다해서일했다

 

노동과 노동 사이 새참. 때론 국수였고, 현장에서 솥뚜껑에 부치는 부침개였고, 또 기억나지 않는 여러 가지였는데 모든 게 꿀맛이었다. 사발로 마시는 막걸리는 물론 최고였고.

 

4학년 때 농활 술자리도 잊을 수 없다. 신입생들보다 대우해주시는 건지 저녁에 집 주인아저씨가 술상을 봐주셨다. 나랑 법학과 복학생인 선배, 아저씨 이렇게 셋이서 둥근상에 둘러앉았다

근데 아저씨가 냉장고에서 꺼내 드는 건 됫병 짜리 경월소주. 일에 지쳤으니 쉬어야 하고, 내일 일을 나가려면 자야 하는 시간인데 말이다. ‘저걸 다 마셔야 잘 수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 속에 쉬 취하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를 다졌다.

 

사실 술은 마시는 양에서 취하는 것보다 마음의 상태에서 취하는 게 결정되기도 한다. ‘오늘 마시다 죽자.’ 하는 날이면 당연히 취하고. ‘오늘 취해선 안 되는 자리야. 정신 차리자.’ 하면 아침까지 마시더라도 좀 말짱하게 버티기도 한다. 이런 경험은 비단 나만의 경험이 아닐 것이다.

 

한데 법학과 선배는 마시다 졸기 시작했다. 안 해보던 농사일 때문에 노곤하기도 했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소주잔에 코를 빠뜨렸다 뺐다 하며 조는데. 절묘하게도 콧구멍까지는 술에 잠기지 않는 각도였다

내가 분발해야 했다. 결국 고군분투 끝에 경월을 비워내고 반듯하게 잠자리에 들었던 흐뭇한 기억이다.

 

일요일엔 냉이를 빠르게 많이 캐기보다 정겨운 수다가 있는 쉬엄쉬엄 시간이겠다. 사람들과 햇볕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고 웃음을 나누고 마음을 나눌 수 있을 터라. 다행이다. 나를 제외하면 너무나 열심히들 살아서 누구 보다 쉼이 필요한 사람들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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