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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어가는 중

  • iron
  • 2020-11-08 18:16
  • 3,033회

'아니, 다들 표정들이 왜 그래요? 집에 이런 거 한 그루씩은 모두 있는 거잖아요.' 가지가 휘어지게 감이 달린 감나무가 집집이 있고, 가로수조차 감나무인 곳.

마악 따서 와작 한입 베어 물면 ', 이래서 단감이라고 하는구나' 싶게 입안 가득 퍼지는 단맛.

경남 하동군 악양면으로 두레 생산자회 단감 생산지를 찾아갔다.

 

감의 맛이 자부심인 생산자분에게 맛의 비결을 들었다. 그저 맛이 들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과 땅심을 키워주는 것이란다.

몰라서 못 하는 게 아니라 알아도 하지 못하는 비법.

기다려주는 일을 할 수 없는 건 '꼭지 들림'으로 쉬 무르게 되는 상황과 낙과를 맞이하기 때문이다.

 

농민은 버려지는 것 하나 없이 모두 팔려 하고, 상인은 유통기한 넉넉하게 딴딴한 걸 사려 하고.

시중 감 봉지가 붉은 이유. 덜 익은 감을 출하하고 붉은 봉지에 넣어 덜 익은 때깔을 가리려는 거다

 

충분히 다 익은 감은 색을 입히지 않은 투명한 봉지에 넣으면 그만.

상품화하지 못하는 감은 감나무 밑에 던져주거나 감식초로 만들어 뿌려 감나무에 돌려주면 그만.

사람도 감도 솔직할 뿐이다.

 

바람 한 점 없어 풀 한 포기도 그림으로 서 있는 아침을 맞이하고. 이 가을이 다 가기 전 가을 산을 담으러 피아골에 들렀다.

늦으면 늦는 대로 기다려주고, 무슨 말에도 허허 웃어주고, '피곤하면 의자 눕히고 주무세요.' 하는 두레 생산자회 사무총장님의 차를 타고 편하게 전국을 다닌다.

 

결혼식 화동의 종이 꽃잎 뿌리기처럼. 달리는 차 위로 간간이 낙엽이 뿌려지니 운치가 있었다.

", 날이 좋네요." 감탄이 흘러 나오고, "곱다." 혼잣말이 절로 나오던 시간.

'노랗게 노랗게 물들었네. 빨갛게 빨갛게 물들었네.' 고운 가을 길이었다.

 

연곡사 입구엔 순국 영령비가 있었다. 가까이 가서 읽어볼 필요도 없이. '순국'엔 배제되었을 핏빛 빨치산의 설움을 느꼈다.

 

엊저녁. 생산자분은 대접의 의미로 갈빗집에 가자 했지만반짝반짝 섬진강 변에서 갈비가 웬 말이냐 웬 말이냐. 화개장터 '혜성식당' 참게탕을 먹었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넘나들어 아침은 경남 하동에서 감 따기 일꾼들과 수제비 어묵탕을 먹고. 점심은 전남 구례 '선미옥'의 다슬기 맑은탕과 다슬기 토장탕, 다슬기 장무침을 먹었다.

 

피아골 연곡사 해우소엔 인심 박하게도 휴지 한 장 없이 입구에 500원 동전으로 뽑는 휴지 자판기만 덜렁 있어서. 근심 한 점 덜어내지 못하고 그냥 나왔는데.

식당 화장실엔 머리통만 한 두루마리 화장지가 두 통이나 걸려있었다. 넘치는 건 부족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화장실 휴지만큼은 누군가 만감이 교차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건 그렇고. 장거리 운전을 맡은 사무총장님은 지난밤 음주로 만족하고. 식당에선 나만 해장술을 마셨다. 고택찹쌀생주 귀여운 500밀리 한 병이 반주로 딱. 알콜성 치매가 걱정인데 그래도 영민해질 때가 있다. 바로 음주 직후다

"남천!" 식당 마당에 빨간 열매 주렁 단 아이 이름이. 술을 마시기 전엔 알고 있어도 떠오르지 않던 단어가. 술 한잔 마시고 나오니 바로 생각나서 자신 있게 외쳤다.

 

이제 낼모레면 감상자가 집으로 오겠다. 사무총장님 댁 근처인 금정역에서 집까지 1시간 넘게 전철을 타야 해서. 무거워서 못 가져간다고 마다했더니 집으로까지 부쳐주는 감.

덩달이 시리즈 "이게 덩달이 책인감?" "이게 수정과에 뜬 잣인감?"

책임감 가득하고 자신감 넘치는 감이 우리 집으로 온다.

 

감나무밭에서 생각했다.

나도 늙어가는 게 아니라 느긋하고 지긋하게 제맛으로 익어가는 중이라고.

이렇게 늘 좋은사람들 가운데서 함께하는 건 전생에 덕을 쌓고 복을 지어서라고.

 

'상엽홍어이월화'라는 시구를 좋아한다. 2월의 꽃보다 붉을, 서리 맞은 잎을 보고 싶다.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에 감밭이 있다. 그 밭에 다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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