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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 그리고 인연

  • iron
  • 2020-10-26 03:07
  • 3,245회

권리찾기유니온 후원전시회를 마친 지 한참 됐다. 드디어 지난 토요일 천안의 신학철 선생님 댁에서 참여 작가들과 모이는 자리가 마련됐다. 임옥상 선생님과 기차를 타고 천안으로 가는 길이었다.

아무래도 화가시니 그림 관련 이야기를 꺼냈다. 그림 그리는 시간을 제일 행복해하는 내 딸아이 얘기도 했다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좋아한 미술 선생님 이야기도 나왔다.

 

그 선생님이 1년 지나서 대학인가로 옮기셔서 그랬지. 중학교 내내 계셨음, 제가 화가가 됐을지도 몰라요.”

 

과장이지만 진심이기도 했다. 당시 그림 그리기에 영혼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은 수업 시간이 끝나는 대로 곧장 선생님께 검사를 받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냥 다 그렸어요.’ 하고 내밀고 싶지 않았다.

수우미양가 점수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내 마음이었다. 집으로 싸 가서 밤을 새워 완성했다. 정성에 정성을 다하고 이젠 됐다.’ 붓을 내려놓을 수 있는 상태가 돼야 비로소 다 그린 것이었다.

 

어릴 때 야단맞을 짓을 하는 일이 없었는데 단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바로, 낙서였다. 이 책 저 책 여백에도 그렸지만, 방과 방 사이 벽에 하얗게 회칠해놓으면 그곳에 커어다란 벽화를 그리곤 했다. 맞을 걸 알았지만 손이 절로 그렇게 했다.

좋아했던 그림 그리기가 좋아하는 선생님을 만나 발화했다고나 할까. 선생님의 수업과 주욱 함께 했다면 아름다운 삶을 권유하다참여 작가로 천안행 기차 안에 앉아있을지도 모를 일이란 얘기다. 그 시절 선생님의 영향은 참 큰 것이고 인생의 향방을 가르기도 하니 말이다.

 

맨 처음을 기억한다. 교실에 들어올 때 다른 선생님들처럼 근엄하게 들어오지 않았다. 교실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와선 칠판에 이름을 썼다. 내 아들 이름은 추석이고, 내 딸 이름은 설날이라고 얘기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총각 선생님이었다.

한번은 선생님께 그림 검사를 받으러 교무실로 갔는데 저 선생님께 먼저 보여드려라.’ 했다. 역시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선생님은 한문 선생님이었다. 그랬다. 내가 좋아한 미술 선생님은 소년 같은 장난꾸러기였다.

 

곱슬머리가 자유롭고, 웃으면 안경 속에서 작은 눈이 초승달눈이 되는 정도가 특징일까. 평범한 외양이었다. 외모는 범상했지만 화내는 모습 한 번 볼 수 없이 늘 웃으며 우리를 대하는 태도는 인간미 뿜뿜이었다. 집이 부유하고 공부 잘하는 몇몇만을 편애하는 게 아닌, 우리 전체를 품어주는 선생님이었다.

 

수업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선생님을 좋아해서만이 아니라 수업이 정말 재밌었다. ‘수제천이란 곡을 듣고 그림으로 표현하고. 동화 속 한 장면을 그려보기도 하고. 작게 등분한 규칙적인 도형 안에 색을 채워 넣기도 했다. 그런 다양한 시도 속에 내가 혼을 불어넣었던 작품들을 기억한다.

엄마가 내 책상을 정리한다며 서랍째 들어 아파트 쓰레기통에 털어버렸던 것 중 보물 1호가 바로 그런 그림들이었다.

 

자기가 그리고 싶은 사람을 그려 고무판화로 찍는 시간. 난 선생님을 그렸다. 선생님은 뒷짐을 지고 아이들 작업을 보며 지나가다 내 그림을 보곤 웃었다. 그림은 누가 봐도 곱슬머리 웃는 눈의 선생님이었다.

근데 이때도 그랬지만 때때로 내 행동이 귀엽다는 듯 내 볼을 쫘~악 잡아당기곤 해서 여간 난처하지 않았다. 아픈 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난 선생님 앞에서 언제나 예쁜 여학생이고 싶은데, 볼따구 늘어난 우스운 모양새라니. 선생님은 13살 소녀의 마음을 너무도 몰랐다. 이럴 때 좌절의 OTL을 써야 하지 않을까.

 

덜컹덜컹 기차 안에서 추억에 잠겨 임 선생님께 미술 선생님 이름을 이야기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어 우리 학교 후배 같은데.”

제가 13살 때 30살 쯤 되셨어요.”

그래 나이가 그쯤이지. 안경 쓰지 않았어?”

네 맞아요. 웃으면 눈이 반달보다도 작아지고... 참 좋은 분이셨어요."

그래, 따듯하고 순진무구한 사람이지.”

 

다른 것도 맞추어보며 선생님인 것을 확인했지만 사실 순진무구라는 한마디에 바로 선생님인 줄 알아버렸다. 선생님을 네 글자로 표현한다면 바로 그러하니 말이다.

이런 선생님을 향한 내 마음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순정이 아닐까. 순정은 순정만화에만 있는 것이 아닐 테니 말이다. 알퐁스 도데의 별'이라는 수필의 양치기처럼 상대방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 상대방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과 잘 되길 바라는 마음. 딱 그 상태의 영원한 마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화 속 캐릭터 인어공주의 떠나가는 마음을 닮은 마음.

 

그러고 보니 나도 짝사랑을 한 적이 있구나, 새삼 느꼈다. 아홉 살 때 짝꿍을 혼자 좋아한 뒤로 짝사랑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평생 그렇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열세 살 꼬맹이 적에 상대방과 사귄다거나 하는 생각 조금도 없이 그냥 좋아하고 그냥 열심이던 마음이 있었구나, 혼자 그러는 건 비극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예쁜 마음이구나, 하고 느낀다.

 

신기한 우연으로 다시 만나는 소중한 인연의 기대. 연락해서 임 선생님이랑 셋이서 술 한잔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이 뇌출혈로 쓰러진 지 10여 년쯤 된다고 한다. 말도 어눌하게 할 정도로 회복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모르니만 못하지라고 임 선생님은 안타까워했지만 나는 달리 생각한다. 안타까운 건 아픈 사실이지 그 사실을 아는 것이 아니다.

 

전에 겨울연가라는 드라마를 몰아보기 한 적이 있다. ‘욘사마 열풍의 남주인공 캐릭터가 궁금했다. 보고는  실망했다. 배용준이 맡은 남주인공은 슬프면 스키장 제설기 앞에 선다. 눈물인지 눈이 녹은 물인지 알 수 없도록. 슬픔과 아픔을 사귀는 사람에게조차 털어놓지 않고 혼자 안고 가는 강인한 사나이’. 해서 최지우가 맡은 여주인공을 넌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행복하게 웃으면 된다고 설정하는 사람이었다.

난 모르고 웃는 인형보다는 고통을 느끼더라도 아는 사람이 되길 선택하겠다. 상대와 함께 상의할 수 있는, 살아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내게 욘사마 열풍은 내내 이해되지 않는 현상으로 남았다.

 

피천득의 인연이란 수필을 보면 백합같이 시들어 가는아사코의 모습을 본 세번 째 만남을 후회하는 게 나온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고 덧붙인다. 나는 피천득의 생각과도 다르다.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라면 나는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 하지만 기억이나 할지 모를 제자를 위해 아픈 사람에게 시간을 내서 밖으로 나오라고 하는 건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이다.

임 선생님과 몇 년에 한 번 꼴로 아주 가끔 전시회 등에서 마주칠 때가 있다고 하니 그럴 때 기회를 얻어 보려 한다. 만나면 선생님 덕분에 아름다운 시기 아름다운 1년을 보냈다고, 영혼을 키워주셔 고맙다고 인사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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