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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저씨

  • iron
  • 2020-06-25 16:57
  • 4,803회

이선균과 아이유 주연의 예전 드라마 나의 아저씨’. 거기 나오는 정희네술집이 자신이 그리는 미래상이라는 친구가 있다. 찌질한 게 좋아서 찌질이들의 놀이터에서 같이 늙어가고 싶은 꿈이라고. 그곳은 궁상맞아도 되고 내 부족을 드러내도 부끄럽지 않고 주눅 들지 않는 곳이라니. 정희네가 뭔가 싶어 최근에 드라마 몰아보기를 했다.

 

나의 아저씨를 보면서 현실감을 강하게 느낀 부분이 있다. 자신의 이전 가족에게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이선균은 흡사 나의 남편 같았고, 내 새끼가 제일 중요하다는 고두심은 마치 내 시어머니의 현신 같았다.

 

이선균은 큰 차를 사고 싶어 했는데 식구들 다 태우고 밥 먹으러 다니고 싶어서다. 그 식구란 자신과 아내와 아이인 현재 식구가 아니라 자신의 엄마와 형과(형수와 조카와) 동생을 포함하는 식구다. 직장 유지도, 가정 유지도, 출세의 간절함도 평생 고생한 엄마에게 보상해야 하는 의무 때문이고 집안의 기둥이어야 하는 존재의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이선균과 커플은 정작 아내인 이지아가 아니라 엄마인 고두심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수많은 엄마와 아들 커플. 고두심은 며느리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사법시험을 통과해 변호사가 돼도 진심으로 축하해 주지 않는다. '내 새끼보다 잘난 것들은 내 자식 주눅 들게 만드니 꼴 보기 싫어서'다.

 

이 드라마엔 이선균의 장인, 장모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이선균의 돌아가신 듯한 아버지는 회상의 대사로도 나오지 않는다. 그야말로 존재감 제로다. 주위에선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의 러브라인도 제로라고 평하던데 내 판단은 다르다.

 

불우한 스물한 살 아이유와 그이를 조건 없이 돕는 사십 대 초반 이선균이 사귀는 건 사람들의 도덕심을 건드릴 수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스물다섯쯤 된 아이유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이선균의 선배와 바람났던 아내는 미국 유학 가 있는 아들 곁으로 공부를 더 하러 떠난 설정이다. 네가 결혼생활을 유지하자면 유지하고, 네가 헤어지자면 헤어지겠다는 아내의 말대로 그는 자유다.

 

아내가 미국으로 간 뒤 이선균이 마트에서 산 라면과 고두심이 해다 준 멸치볶음으로 혼밥을 먹다가 우는 장면이 있다. 식탁 맞은편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엔 대형 가족사진 속 아내와 아이가 있을 법하다.

나 하나 희생하면 되지.’ 정신으로, 표면적인 행복을 가장하며 불행한 나날을 견뎌온 그가 운다는 건 새로운 출발을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부산의 회사에 취직해 작별하는 아이유와 행복하자. 이제 우리 진짜 행복하자.”고 했으니 그 울음 끝 성장은 머리가 아닌 마음이 가는 대로 여야 마땅하다는 해석이다.

아이유 역시 이선균이 여러 차례 도와줘서가 아니라 도청을 하며 자신과 닮은 그이의 속살을 보았기 때문에 마음을 연 것이고. 닮은 영혼이라는 건 몇 년의 세월 쯤은 넘어설 동질감이라 짐작한다.  

 

해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서로를 담아두었을 마음들이 만나는 드라마의 끝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연락해라.”

. 한번은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리고 싶었어요.”

표면적으론 "밥 좀 사주죠.’" 얻어먹던 신세에서 보은하는 것이지만. 다시 만나는 게 아니라 새로 만나는 거다. 절제했던 마음들을 이제사 펼치면서 말이다.

 

드라마의 끝에서 내가 느끼는 안타까움은 '광일이는 어떡하지?'였다. 어릴 적부터 아이유를 좋아했지만.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아이유를 좋아하는 마음을 인정할 수 없고. 아버지처럼 일수꾼 폭력배가 돼서 아이유를 괴롭히는 광일이.

아이유는 어서 빚을 갚고 그 마수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광일이는 아이유 할머니 요양원 빚까지 대신 갚아서 자신에게 갚을 부채를 늘린다. 어긋난 사랑의 방식으로 아이유를 자신의 곁에 묶어두려 한다.

아이유를 감옥에 보내려 하는 이유도 아버지의 복수라기보다 감옥에 가 있는 동안 이자가 눈덩이로 불어나 평생 갚지 못할 빚으로 만드는 데 있다. 자신을 떠나서 훨훨 날아갈 수 없도록 하는 데 있다.

 

아이유는 이선균이라는 키다리 아저씨를 만나 따듯한 세상으로 영입됐다. 이선균을 배신하지 않은, 의리의 아이콘 아이유는 회장의 선처로 낙하산 정직원이 되고, 과거를 세탁하고 새롭게 출발한다.

광일이는 이선균과 대척점에 있던 김영민에게 주면 1억이든 10억이든 뜯어낼 수 있던 녹취 유에스비를 그냥 이선균에게 보낸다. 그런데도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곰곰 생각해보니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훨훨 떠나보낼 수 있는 성숙을 얻었다

 

드라마가 그저 한 개인의 운 좋은 탈출을 그릴 뿐 비정규직 흙수저의 사람들을 드러내진 못했다는 생각 한편으로 나 자신에게 드는 성찰도 있다.

광일이를 맡은 장기용이라는 배우가 모델 출신으로 잘 생기고 키 크고 비율 좋고 그런 외양이 아니었대도. 내가 어둠의 세계에 남은 광일이에게 이렇게 마음이 쓰일까 하고.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에게 물어본다.

 

여담. 친구가 나중에 찌질이 놀이터를 같이하자 해서 화들짝 놀라 거절했다. 내가 술안주를 만들면 모두가 홧술을 마실 거라서 그랬다. 가끔 놀러가 설거지나 돕겠다고 하니 삐끼를 하라고 했다. 참으로 적절한 영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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