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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 iron
  • 2020-06-16 15:58
  • 4,265회

요리에 얽힌, 내 주변 한 사람 한 사람 이야기

 

#1. 시어머니

강화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신다. 예전엔 조금 더  큰 식당을 하셨다. 내가 신혼 초기일 때 결혼식 피로연 단체 손님 예약으로 바쁘다고 하셔서 도우러 갔다. 수정과에 띄워야 한다며 배 하나와 찍기 도구 하나를 주셨다. 시어머니며 다른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사이 나는 오른손엔 도구를 들고 왼손엔 배를 쥐고 가만히 서 있었다. 수정과를 먹어는 봤는데 어떻게 해야 동그란 배에서 그런 얇고 작은 모양을 낼 수 있을지. 미지의 세계를 연구하고 탐구하며 서 있었다. 이후로 시어머니는 부엌에서 내게 본격적인 무언가를 맡기거나 하지 않으셨다.

 

#2. 시아버지

내가 결혼해서 맞은 첫 어버이날. 시부모님과 시작은 부모님을 집으로 청했다. 뒷면에 레시피가 적혀진 몇 가지 일품요리 재료를 샀다. 밤새 소꿉놀이하듯 따각 따각 서툰 칼질을 하며 상을 차렸다. 남편은 나가서 생선회를 떠 오고, 명태조림 등을 사 왔다. 드시다가 “뭘 이렇게 많이 차렸냐~” 커다란 접시들이 상에 가득하니 불편하셨는지 좀 추려내셨다. 밤새 내가 한 ‘요리’들이 상 밑으로 내려지고 밖에서 사 와서 그릇에 담기만 한 것들이 상 중앙으로 모였다. 시아버지는 모르셨겠지만 하나도 예외 없이 참으로 정확하게 골라내셨다.

 

#3. 선배

신혼집들이. 고교 동창생이 멀리서 차 타고 와서 요리를 한 상 차려주고 바람처럼 사라지던 시절. 나도 뭐 하나 하려고 신문에 적힌 요리법에 따라 귤로 마멀레이드를 만들었다. 시간과 노력과 정성의 ‘작품’이었다. 풍물동아리 선후배 집들이라 술기운이 돌고 위 학번 선배들이 속속 도착하자 전통(?)의 징돌이 대신 프라이팬돌이를 하게 됐다. 막걸리에 비듬을 털고 양말을 빨던 시절이 있었다면 그날 선배가 프라이팬 막걸리에 못 먹을 것으로 쏟아 넣은 것은 내 비장의 마멀레이드였다.

 

재료 손질하고 씻고 썰고 무치고 끓이고 볶고 한참을 공들여도 결과물은 한 주먹의 반찬 몇 가지. 요리의 세계는 내가 들인 인풋에 비해 형편없는 아웃풋이 나오는 보람 없는 세계였다. 과감히 접었다.

아이들을 낳고는 성미산마을에서 기왕 있는 곳은 애용하고, 없는 것은 만들어 이용했다. 아이들을 키운 건 8할이 친환경 반찬가게 ‘동네부엌’, 친환경 식당 ‘성미산밥상’, 공동체 주택으로 한 분이 오셔서 밥과 국과 반찬을 해주시는 ‘저해모(저녁해방모임)’였다. 아이들이 자라서는 내가 술자리에서 싸 오는 남은 안주도 별식이었다.

 

#4. 둘째 아이

아이들 어릴적. 김 달걀말이를 했다. 첫째 아이가 눅눅해서 맛이 없다고 평했다. 둘째가

“엄마, 난 맛있어.”라고 말하길래

“다음에 또 해줄게.”라고 다정하게 말했다.

둘째가 망설이는 표정으로

“엄마… 미안해.”라고 답했다.

어린 마음에 엄마 상처받았을까 위안이 되고 싶어 맛있다고 했다가 또 먹게 될까 봐 솔직해진 것이었던 것이었다.

 

#5. 남편

몇년 전. 김치찌개를 하고 있었다. 남편이 몇 박 며칠 해외 출장을 마치고 돌돌이 가방을 끌고 집으로 들어왔다.

“외국에서 김치 먹고 싶지 않았니? 내가 김치찌개하고 있다.”

남편은 여행 가방만 두고 바로 나가버렸다.

 

#6. 첫째 아이

한두 해 전의 대화.

“엄마가 언제 무서워?”

“어 이렇게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을 때 무서워.”

“왜?”

“‘이걸 내가 먹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며 양쪽 팔에 소름이 돋아.”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줄 테니 결혼해 달라는 누군가의 낡은 청혼 대사도 있다는데, 아들이 엄마는 가스 불 한 번 켜지 말고 살라고 얘기해 준다.

 

둘째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쓴 ‘내게 특별한 사람’이란 시로 글을 마무리.

 

우리 엄마는 특별하다/ 우리 엄마는 착하다/ 우리 엄마는 천사 같다/ 우리 엄마는 무섭다// 우리 엄마는 내게 특별하다/ 엄마는 나를 낳고 키워줬다/ 엄마가 나를 조종하는 것 같다/ 엄마가 슬플 땐 나도 슬프고 엄마가 기쁠 땐 나도 기쁘다// 엄마는 마법사 같다/ 엄마랑 싸워서 내가 삐쳤을 때 엄마가 뭘 마법의 00이라고 말해주면 기분이 풀리고/ 어떻게 그렇게 만드는지 모르겠는데 엄마가 직접 만든 요리는 김밥 말고 다 맛이 없다/ 아빠가 만든 요리는 맛있는데/ 엄마는 특별한 사람

 

참고로 아빠가 만드는 요리는 그제나 이제나 늘 라면이란 걸 덧붙인다.

댓글목록

피리님의 댓글

피리 작성일

저는 요리에 정말 재능이 없어서...ㅎㅎ 옛날 남자친구한테 블루베리 팬케이크 직접 구워주고 사진 찍었더니 간장게장 같다고(...) 그랬었어요ㅎㅎㅎㅎㅎ

은혜님의 댓글

은혜 작성일

ㅎㅎㅎㅎ
김우님이 못하는 것도 있었군요..
전 요리 쫌해서.. 항상 부엌에서 살았다는..ㅋ

iron님의 댓글의 댓글

iron 작성일

어 아이디만으론 모르겠는데. 은혜님이 만약 저를 잘 아는 분이라면. 손가락 열개를 쥐었다폈다하며 꼽을수있으련만...
은혜님의 은혜로운 음식도 맛보고 싶네요. 제가 설거지는 쫌 해요.^^

초록별님의 댓글

초록별 작성일

iron님 글 좋아요 추천하려는데 로그인 하라하여 로긴했네요. 좋은 글 편히 읽는데 이 정도는 수고해야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