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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책을 사랑한 소녀

  • iron
  • 2020-06-03 06:09
  • 4,112회

주번. 난 주번을 맡기 전주 금요일 저녁부터 바지런을 떨었다. 담임선생님 방석보와 테이블보를 벗겨 가져갔다. 드디어 주번의 시작인 월요일. 늘 지각하던 아이가 새벽같이 일어나선 깨끗이 빨래한 보를 챙겼다. 아껴둔 용돈으로 학교 앞 화원에서 꽃을 샀다. 교실의 교탁과 교무실에 있는 담임선생님 테이블 화병에 꽃을 꽂아 턱 내려놓는 일. 슬기로운 주번생활 일주일의 시작이었다.

쉬는 시간에도 쉬지 않았다. 1교시가 끝나면 교실 앞을 쓸고, 다른 교시가 끝나면 복도나 교실 뒤를 쓰는 식이었다. 수업 중에도 생각했다. ‘이번 수업이 끝나면 칠판지우개를 털고 칠판 밑에 쌓인 분필 가루를 닦아야지.’라고. 

‘내가 움직여 반 친구들과 선생님이 편할 수 있다면.’ 하는 갸륵한 헌신이었다고나 할까. 

 

청소 시간에도 조금 남다른 점은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선생님이 사라지면 장난치고 놀았지만, 난 선생님이 100번 닦으라고 했으면 “아흔일곱 아흔여덟 아흔아홉 배액~” 하는 식으로 운율에 맞춰 꼭 100번을 채웠다.

지각해서 벌칙으로 왁스를 내야 할 때면 나만 규정대로 300원짜리 캥거루표 왁스를 냈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유사품인, 100원짜리 곰표 왁스로 갈음했는데도 말이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아도 내가 나를 지켜본다고나 할까. 

 

초등학교 때도 비슷했다. 당시엔 등교 시간 정문에서 가슴 왼편에 손을 얹고 국기에 경례를 하는 규칙이 있었다. 또 운동장을 빙 둘러 놓인 징검다리를 밟으며 교실로 들어가야 했다.

지각하느냐 마느냐 분초를 다투는 시간. 모두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생략하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갈 때도. 나 혼자 모든 것을 다아 지켰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로 시작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한 자 한 자 속으로 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파랑 신호등에 건너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말이다. 

 

채변봉투에 내용물이 잘 담겼는지 확인하라는 지시. 수업 시간을 면제받아 교정 스탠드에 앉아서도 마찬가지였다. 빠뜨리는 것 없이 하나하나 소중히 들어서 햇빛에 비추며 검사했다.

그런 상황일 때 여러 생각이 들곤 했다. 어떻게 다른 것을 넣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거지? 불로 비닐을 지져서 종이봉투에 넣으라고 했음에도 아니 어떻게 그냥 넣어 냄새가 나게 할 수 있는 거지? 도대체 어떻게? 도대체 왜! 

통과만을 목표로 과정을 얼렁뚱땅 속이거나 설렁설렁 생략하는 게 내겐 의문투성이였다고나 할까. 

 

도덕책을 좋아하고 조금 더 자라선 윤리 책을 가슴에 품었다. ‘사람이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하는 화두가 있었다. 시험 기간에도 점수 배점 높은 과목을 놔두고 윤리 책을 펼쳐 조용히 읽고는 해서 친구들은 내가 다른 공부를 다 끝낸 줄 착각하곤 했다.

한편으론 문학소녀이기도 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오는 길. 걸음걸음 시를 외우곤 했다. 하나의 시를 다 외우면 다른 시를 외우고. 그러노라면 학교에 닿아 있곤 했다. 한번은 뒤를 돌아보니 교감 선생님이 기척 없이 뒤를 따라오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아 참으로 반듯한 학생이었다고나 할까. 

 

늘 하라는 것을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으며 지내서였을까. 고3 때 학교 쓰레기 소각장 쪽 담을 넘어 쭈쭈바를 사 먹고 들어온 적이 있는데. 들켜버렸지만 혼은 나지 않았다. 교무실에서 담임선생님이 같이 담을 넘은 친구에게 계속 야단을 치며 나한텐 아무 말도 없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저 선생님, 저도 담을 넘었는데요.”

 

선생님은 내 쪽은 보지도 않고 친구를 다그쳤다.

 

“그러니까 이 자식아. 니가 어떻게 했길래 얘가 담을 넘었냔 말이야.”

 

이후... 그 친구완 예전처럼 지내기 어려웠다.

 

수학여행 때 아이들이 화투 좀 치고 술도 좀 마시는 늦은 시간이었다. 교련 선생님이 방에 기습적으로 들이닥쳤지만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열외가 됐다. 그저 잠이 들었던 걸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친구들과는 모두와 사이좋게 지냈다. 좋아하는 친구를 묻는 인기 투표에선 1위였다. 중3 때 담임선생님은 교무실로 따로 불러 안타깝게 얘기했다. 

 

"친구들이 이렇게 좋아하는데. 공부에도 신경을 좀 쓰지 그러니."

 

하지만 사람은 부족함이 있어야 다른 이를 이해하는 마음이 넓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넓은 마음으로 지냈다.

친한 친구들과만 맛있는 걸 나누는 걸 넘어서고 싶어서. 시골에서 밤이라도 한 자루 오면 큰 솥에 삶아서 호일에 바리바리 싸서 학교에 갔고. 뒷줄에서부터 한 개씩 아이들의 손바닥에 놓아주며 같이 방긋 웃는, 참으로 아름다운 정경으로 살았다고나 할까. 

 

암튼 그랬다. 예전엔 맨 꼭대기까지 채웠던 단추를 하나쯤은 풀고 다니지만. 사실 지금의 삶도 별반 다르진 않다. 달라진 게 있다면 세상이 강제하는 것 대신 내가 세운 도덕 속에서 살아간다고나 할까.

어린 날의 고민 역시 연장선에서 안고 있다. 사람이라면 어떠해야 하는지, 이 사회는 어떻게 바뀌어야 사람 사는 세상의 모습을 갖출 것인지, 나는 어떻게 살 것인지, 나는 무엇을 할 것인지.

윤리 책에서 제일 좋아했던 단어. 호연지기. 천만인이 반대해도 나의 길을 간다는 것만큼은 언제나. 확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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