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공유하기

정의란 무엇일까 – 김관홍을 생각하다 | 사람

  • 김우
  • 2020-06-22 17:58
  • 6,046회

세월호 참사 304명의 희생자 중 292명을 민간 잠수사들이 수습했다. 도움이 되고자 달려온 잠수사들은 10분 잠수 뒤 11시간을 쉬어야 하지만 하루 3~4회 잠수를 했다. 이후 대개가 골괴사 등 잠수병과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수습활동 중 쓰러져 입원했던 잠수사 김관홍은 죽을 수도 있다는 병원의 얘기에도 다시 바다로 갔다. 몇 안 되는 잠수사들에 실릴 하중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해자 가족의 애타는 마음에 누구보다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희생자 수습 과정이 지난 뒤엔 그렇게나 좋아하던 바다에 들어갈 수 없게 됐다. 대리운전 일을 하며 새벽녘 설핏 잠들면 깊고 어두운 바닷속에서 아이들을 찾아 안타깝게 숨바꼭질하는 꿈을 꾸어야만 했다. 한 명도 구하지 않은 이들은 다리를 뻗고 자고, 한 명이라도 더 구조하고 수습하고자 했던 이들은 힘겨운 날들을 보내는 아이러니였다. 

 

 

[사진1] 故 김관홍 잠수사가 해경이 준 감사장을 보이고 있다. 해경은 민간 잠수사들을 검찰에 고발했다.

ⓒ4·16 연대, 「고 김관홍잠수사 2주기영상- '나 김관홍이야'」

 

 

[사진2] 故 김관홍 잠수사가 해경이 준 감사장 '쪼가리'를 찢고 있다.

ⓒ4·16 연대, 「고 김관홍잠수사 2주기영상- '나 김관홍이야'」

 

바다를 사랑했던, 다시 태어나면 바다 거북이로 태어나고 싶다던 그이는. 이제는 매일 바다로 갈까. 유가족이 돼버린 아내가 하는 화원 ‘꽃바다’에서 ‘묘이 고사리’ 위에 한 줌 햇살로 머물기도 할까. 김관홍은 내 지인 중에 가장 ‘깍두기스러운’ 외양이었지만 사실은 사람 좋아하고 붙임성 있던 보드라운 사람이었다. 자신이 좋아한, 보드라운 털에 덮인 묘이 고사리를 똑 닮았다.

 

그이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 라는 정의가 분명했다. 그래서 세월호가 빠진 바다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팟캐스트 [416의 목소리]에 출연해서 답한 이야기다.
 

“나도 두렵고 도망가고 싶었던 건 사실이에요. 나도 가족이 있고, 내 생명이 위험하다는 걸 알았고 매번 죽음을  생각해야 했죠. 그 많은 주검을 보고 있으며.”
 

“그런 과정 중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거기에 계속 계셨던 이유가 궁금해요.”
 

“우리보고 왜 거기 있었고, 왜 갔고, 왜 나오지 않았는지 얘기하면… 저도 몰라요.”
 

모르겠다는 그 마음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란 걸 우리는 안다. 공감하는 마음, 정의로운 마음, 용기 있는 마음이란 걸 안다. 

 

그이는 세월호에서 안내방송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끝까지 구조를 기다리던 사람들, 이제 헬기가 왔으니 우리를 구해줄 거라 믿었던 사람들처럼 국가를 믿었다. 의심 없이 대한민국은 정의로운 국가라고 생각했다가 ‘나쁜 나라’인 걸 알고 괴로워했다. 앞으로는 감사장을 주며 뒤로는 잠수사를 형사고발 하던 해경과 희망 고문만 하던 정부에 억울해했다. 

 

그이의 헌신은 버려지고 짓밟혀졌다. 그런 그이가 떠나며 “뒷일을 부탁합니다.” 라고 했으니 살아남은 우리는 우리의 몫을 해야만 한다. 우리의 몫.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일은 변함이 없고 우린 지치지 않고 그 길을 걸을 것이다.

 

전 세월호 참사 민간 변호사였던 박주민 의원은 4년 전 김관홍법을 발의해서 20대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원안은 세월호 참사로 상처받은 이들을 지원 대상에 포함하는 내용이었지만 누더기 안에는 민간 잠수사 피해 보상심의위 심사 정도가 남았다. 4·16가족협의회와 4·16연대는 국회의원들에게 ‘세월호 참사 5대 정책과제’ 약속을 제안했다. 정책과제 중에는 21대에서 김관홍법 재개정을 촉구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이것은 재난 상황의 피해지원이 국가적 책임이라는 기준과 표준을 만들어 가는 일이기도 하다.

 

김관홍은 서울 구치소로 4·16연대 박래군 대표를 면회 가며 처음 만났다.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 동거차도에 가서 1박 2일의 시간 동안 친해졌다. 안산에서 팽목까지 가는 밤 버스. 수면제에 취해서도 잠을 이루지 못해 내리며 비틀거리던 발걸음을 잊지 못한다. 간혹 망원 우체국 사거리라는 연락이 왔다. 볼일이 있어서 왔나 보다 했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사람 좋아하는 그이가 부러 찾아온 것이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싶다.

 

김관홍을 마지막으로 만난 건 2016년 6월 어느 날이었다. 술 한 잔 얻어먹을 일이 있다며 마포로 찾아왔다. 박주민 변호사 선거운동을 지원하고 당선 뒤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너무 피곤해. 이제 그만 잘게.” 라는 새벽의 카톡을 남기고 떠났다. 잠들기 어려워하던 그이가 영원히 잠이 들어버린 것이었다. 며칠 뒤가 바로 그이의 생일이었다.

 

이름 앞에 ‘고(故)’자를 붙이게 된 김관홍의 4주기 추모문화제 ‘기억과 약속’의 자리에 갔다. 영상에서 그이를 다시 보았다. 이야기 손님들이 ‘우리’ 김관홍을 떠올리는 말 속에서 그이를 다시 만났다. ‘계산하지 않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라는 적확한 표현이 마음을 울렸다.
 

억울한 사람이 가득한 세상에서 억울한 사람과 억울한 사람을 돕는 사람이 억울하지 않은 세상을 같이 꿈꾸었다.
 

‘이제 4월은 내게 옛날의 4월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지난날의 우리가 아니어야 한다.
 

 

 

 

김우

권유하다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