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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팡 노동자 이야기 ① – 너무 일찍 와버린 디스토피아 세상 | 사람

  • 김우
  • 2020-06-22 13:57
  • 13,314회

“이런 곳이 있을 거라 상상도 못 했어요.”
 

현장은 빨간 조끼와 노란 조끼의 세상이었다. 관리직인 삼사십 대 빨간 조끼와 관리자를 보조하는 비정규직 이십 대 노란 조끼. 노동자는 이름도 없이 바코드 번호와 ‘사원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관리자끼리는 수다를 떨어도 사원은 그럴 수 없었다. 옆 사람과 이야기만 나눠도 불호령이 떨어졌다.
 

“여기 일하러 왔잖아요.”
 

쉴 새 없이 일하다 쏟아져 나오던 물량이 조금 텀이 있어 주춤하기라도 하면 소리소리 질렀다.
 

“사원님들 뭐 하세요? 쓰레기라도 주우세요. 부자재라도 갖다 채워 넣으세요.”

 

목청 좋은 사람 순으로 뽑았는지 빨간 조끼, 노란 조끼는 모두가 일하고 있어도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목에 핏대를 세워 소리를 질러댔다. 소리를 안 지르는 시간은 자신들이 간식을 먹는 시간뿐이었다. 피자며 팥빙수를 시켜 자기들끼리만 먹었다. 


내내 서서 일해야 했다. 의자라는 것은 6개 층에 2층 휴게실에만 있었다. 휴식 시간이 따로 없이 밥 먹는 시간 1시간이 유일했다. 화장실은 눈치를 보며 가야 했기에 밥을 안 먹고 물을 안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현장엔 정수기가 하나 있지만, 물이 없거나 컵이 없을 때도 많았다.

 

 

[사진1] 20일 '죽음과 해고를 멈추는 40리 걷기'의 출발점인 쿠팡 본사 앞. 지난 18일 쿠팡노동자 코로나19 피해상황 증언과 재발방지대책 촉구 기자회견문 제목은 '우리는 한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이 아닙니다'였다.

 


일할 땐 노예였고, 일 안 할 땐 수용소 죄인이었다


쿠폰이 팡팡 터지는 곳이 아니라, 인권이 팡팡 무시되는 곳 쿠팡의 이야기다. 소비자로 우리가 소량 총알 배송, 새벽 로켓 배송을 선택하는 사이 노동자인 우리는 총알을 맞고 로켓이라는 신무기에 쓰러지고 있었다.

 

쿠팡 부천 신선센터 이지안 씨(가명). 나이 마흔아홉, 결혼한 지 20년, 아이가 셋. 몸으로 하는 일은 평소 자신 있었다. 하지만 몰랐다. 이렇게 잠을 못 잘 정도로 일이 고되고, 손이 퉁퉁 붓고 마디마디가 아플 줄은 예상치 못했다. 

 

오후 5시부터 오전 2시까지 ‘오후 조’에서 일했다. 준비는 오후 4시 30분부터 하는데 일은 칼같이 오전 2시에 끝내야지 1분이라도 당길 순 없었다. 마무리까지 하고 줄을 서서 바코드를 찍으면 오전 2시 20분 정도가 됐다.


연장이 기본이었다. 버스 10대 가량 중 3대만 퇴근 시간에 출발했고, 나머지는 연장근무가 끝나는 시간까지 출발하지 않았다. 지칠 대로 지친 몸에 연장근무는 쥐약이었다. 노동자에겐 몸의 피로감이 천근만근이었지만 회사는 심야 조를 뽑는 것보다 연장시키는 게 싸니까 그렇게 했다. 신선센터의 노동자들은 신선할 수가 없었다.

 

신선센터는 커다란 냉장실이었다. 추웠다. 작업복은 부천 신선센터가 만들어지고 단 한 번도 세탁하지 않아서 더러웠다. 하루 알바하는 이들이나 이런 일체형 작업복을 입었다. 볼일을 볼 때는 화장실에서 질질 끌고 아무 곳에나 벗어놓는 것이 작업복이지 위생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모두 사복을 입었다. 내복을 입고, 양말을 2겹으로 신고, 파카를 입고, 털모자를 썼다. 체온이 높은 편이었는데 평상시에도 몸의 체온이 낮아졌다. 골병이 든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현장엔 조마다 100여 명씩 A조부터 F조 까지 ‘사원님’ 600여 명이 일하고, 이들이 쉬거나 하는 꼴을 보지 못하는 ‘관리자님’ 빨간 조끼 10명, 노란 조끼가 또 10명 넘겨 있었다. 


받는 사람을 생각하며 꼼꼼하게 포장하느라 속도가 느려도 관리직엔 수량만 중요할 뿐이었다. 모욕을 주고 창피를 줘서 펑펑 우는 동료를 보아야 했다. 이유도 듣지 않았다. 말하고 싶으면 면담을 신청하라고 했다. 현장에선 자기들만 말하겠다는 태도였다. 회사에 신뢰가 안 생기는데 누가 어떤 불이익을 받을 줄 알고 애로사항을 토로하는 면담 신청이란 걸 할까. 

 

계약직으로 재계약이란 강박관념 속에 살아야 했다. 출고 노동자 오전 조와 오후 조 도합 1,300여 명. 3개월 계약직이 600명, 하루살이 같은 단기 일용직이 700명. 무시와 구박과 통제와 감시 속에 물도 안 마시고 얘기도 못 하며 서로 경쟁적으로 일만 하는 구조였다. 구토가 나오고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운 건 비단 육체적 힘겨움에서만 오는 게 아니었다. 현장에서는 고함이라는 채찍을 맞아가며 노예처럼 일하고, 일상에서는 낮아진 자존감으로 수용소 죄인 같이 살았다.

 

 

[사진2] 쿠팡은 로켓 배송! 그 안에 쉼이 없는 착취가 있고, 노동자의 땀을 넘어 피가 배어 있다.


 

힘들어서 나왔는데 더 힘들어졌다
 

심야수당이며 이것저것 다 합쳐서 월 240만 원 정도. 절실해서 왔으니 너희는 우리가 어떻게 한들 말 못 한다는 게 쿠팡의 태도였다. 사람들은 실제로 그 돈이 절실해서 말 못 하고 자존감 낮아져서 말 못 하고 일하는 로봇이 되어 갔다. 

 

그러다 물류센터에서 코로나가 터졌다. 확진자와 어느 시점에 어느 거리에 있었는지 알고 싶다고 해도 확진자 신상 보호로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집에 가서 대처해야 하는데 아무 정보도 주지 않았다. 알려줄 듯하다가 위에서 전화 받고 안 된다고 했다.

 

확진자와 밀접 접촉자를 가린다는 것도 주먹구구식이었다. 
 

“나랑 밥 먹은 사람은 일하라 하고, 나는 집에 가라고 했어요.”

 

쿠팡의 다른 노동자들 이야기도 동일했다. 코로나로 배송주문은 늘었는데 거리두기라며 사람은 더 뽑지 않고 강도 높은 노동으로 실적만을 요구했다. 노동자를 갈아 넣어 물량을 채웠다. 물류센터에서 확진자가 나온 이후에도 회사는 올라가라, 내려가라, 타라, 내려라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귀가 처리한 빈자리는 인력수급 문자를 발송해 채워 넣었다. 심지어는 자가격리 기간에 다른 지역으로 출근하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단체톡방에 궁금하고 불안해서 톡을 올리면 사측은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의 태도였다. 톡방은 근태만 관리하는 목적으로 운영한다는 거였다. 질문을 들을 의향도 답을 들려줄 의지도 없었다. 

 

부천물류센터에서 발생한 코로나19 확진자는 150여 명을 넘었다. 제대로 된 조처를 하기는커녕 ‘별일 아니니 그냥 근무하면 된다.’는 태도로 라인을 돌리기만 급급했기 때문이다. 확진자 가족 중엔 폐에 전이가 돼서 ‘의료적 조치는 다 취했으나 호전 가망성이 없다. 요양원 같은 곳으로 이송해야 할 것 같다.’는 통보를 받은 이도 있다. 평생 회복 불가능 판정을 받았지만, 쿠팡은 말이 없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낮에는 일하고 밤에도 일하던, 투잡 살이 인생도 다른 일을 포함해서 모든 노동이 끊겼다. '쿠팡에서 일한 게 죄도 아닌데' 이미 사회적 주홍글씨가 되어 격리 기간이 끝나도 받아주는 곳이 없다. 건강은 물론 생계의 위협 속에 단체톡방에는 ‘죽고 싶다.’ 라는 톡이 올라오기도 한다. 역시 쿠팡은 말이 없다.
 

6개월 말이면 재계약을 해야 하는 시기다. 일관되게 쿠팡은 말이 없다. "배송되는 상품은 안전하다." 배송기사인 ‘쿠팡맨’이 죽거나 말거나 물류센터 ‘사원님’이 아프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말고, 앞으로도 주문하고 사고 써라. 쿠팡이 유일하게 내놓은 말이다.

 

 

 

글│사진

김우

권유하다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