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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찾는 사람들] ⑨ 작가는 회사를 다니지 않거든요 | 칼럼

  • 이미터
  • 2021-05-25 12:13
  • 5,200회

 

한 웹드라마의 미술을 맡았을 때, 나의 그림과 도구들을 소품으로 사용한 적이 있다. 작가를 꿈꾸는 가상 인물의 당위성을 위해 그의 주변에 현실에 존재하는 나의 것을 가득 채워 촬영했다. 웹드라마에서 그 인물은 번듯한 직장을 가진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지며 열등감을 느낀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친구, 명품백을 산 친구들의 자랑을 듣고 작업실로 돌아온 그는 그들의 가방이나 여행의 값이 대략 이백만 원은 될 터인데, 자신의 그림이 이백이라는 생각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림을 바라보며 “이게 이백만 원인데... 이 돈이면 나도 명품백 사겠다.” 하고 중얼거린다. 통장 잔액은 10만 원. 바스트 샷에서 풀 샷으로 넘어가고, 테이크를 반복하며 배우가 대사를 읊을 때마다 나 또한 그 활자들을 곰곰이 되새기며 생각했다. 이 장면이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이라 웃으며 넘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사진] 그림을 그리던 주인공은 망연자실한 감정에 휩싸인다. © 스튜디오 위피

 

미술하는 친구 셋만 모여도 어김없이 재생되는 레파토리가 있다.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시작해도 다 같이 ‘어떻게 먹고 살지’에 대한 얘기로 이어진다. 이 주제가 레파토리가 된 이유는 답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생계를 이어나가려면 노동을 해야 하는데,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만드는 일은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좋아하는 것으로 먹고 산다는 자부심으로 생활을 이어나가기엔, 먹거나, 살거나 뭐 하나는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머리를 맞대어보지만, 오늘도 결론이 나지 않는다.

 

 

소외된 청년예술인

 

이러한 고민을 하는 우리는 청년예술인이다. 그럴듯해 보이는 말이지만 이는 그저 정체성으로, 노동과는 연결되지 않는다. ‘청년예술인’이라는 용어는 법이나 사회 제도를 벗어난 비제도권에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동법이 말하는 생애주기에서 비껴간 사람들이다. 

 

노동법에서 청년 예술인은 법적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대부분은 도급 계약으로 작업물을 납품하며 살아가므로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갤러리에 전속되는 경우에도 사업장에 매일 출퇴근하며 노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으로 보호받기 어렵다. 국가 지원 사업에 공모하여 규모 있는 예술을 시도하는 경우도 적절치 못하기는 매한가지다. 지원 사업 주최 단위에서 참가자 사례비에 상한선을 두는데, 보통 참가자들은 사업 진행 과정에서 그것보다 더 많은 노동을 들인다. 창작 과정을 노동이라고 본다면 최저시급을 보장받지 못하며 작품을 내는 것이다.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청년 예술인들은 예술인 복지법에서도 배제당한다. 예술인 증명을 위해서는 일정 기준 이상의 공개 발표된 예술 활동, 예술 활동 수입, 혹은 그에 준하는 기타 활동이 있어야 한다. 미술 작가의 경우 5회 이상 미술, 사진, 건축 전시회에 참여했거나 1회 이상 개인전 개최 등이 요구된다. 업계 경험 적은 사람이 대부분인 청년 예술인 집단의 경우, 예술인 증명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정리하자면 노동자성 인정과 예술활동 증명의 높은 문턱을 넘지 못한 청년 예술인들이 절대다수이며, 이들의 삶과 활동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제도는 거의 없다.

 

 

그들이 사는 세상 

 

창작물을 만들어서 파는 작가는 자영업자에 가깝다. 고매한 예술가? 작업할 때 필요한 태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자영업에는 돈이 들고, 장사가 안 되면 다른 곳에서 돈을 끌어와야 한다. 그래서 예술계에는 ‘투잡’, ‘쓰리잡’을 뛰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아르바이트나 외주로 돈을 벌어서 작업에 쏟는 방식으로 작가 커리어를 유지한다.    

 

그들과 같은 길을 가기로 마음먹고 나는 작가와 양립 가능한 일을 찾기 시작했다. 미술을 하면서도 돈을 받을 수 있는 일. 익숙해질 만하면 다른 일을 시작했다. 입시 미술 강사, 벽화, 미술감독, 취미 유화 과외, 아동 미술 6세 반 선생님, 문화예술 축제 미술팀, 캐리커처 작가, 영상 편집, 미술관 DP, 미대 입시 면접 알바, 백화점 홍보관 미술 같은 것들을 했다. 했던 것들의 대부분은 예술 일용직이었으며 일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못 하는 것들이었다. 여러 군데에 길을 터놓으면 좀 안정적인 생활을 할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일이 몰릴 때는 일상생활이 어려웠다. 무리해도 일을 다 받지 못했다. 그래서 일을 몇 번 거절하면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일이 적을 때에는 돈이 아무리 필요해도 일을 구할 수 없는 딜레마에 봉착했다. 어느 순간 다음을 기약하며 낮은 페이를 부르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알았으면 멈추고 숨 고르기를 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었다. 공연히 만든 탑을 무너뜨릴까 불안했기 때문이다. 이러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으면? 실업급여도 받지 못하는 나는 돈벌이가 뚝 끊길 터였다. 그렇게 멈추지 못하고 최근까지도 예술과 관련 있어 보이는 이력서를 몇 장 써서 냈다. 

 

미술 잡지 큐레이터, 신입 가능. 유튜브 비디오 크리에이터, 경력 무관. 프리랜서 예술 강사. 임금 협의. 지원, 지원, 지원. 

 

개인적인 문제를 차치하고, 후에 알게 된 고용 관계상의 문제는 이 일들을 하면서 한 번도 먼저 고용인이 계약서를 작성하자고 말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문제를 인지한 후부터 계약서 작성을 조심스럽게 물어보고 있으나 사장님들은 한결같이 생경하다는 반응이다. 업계에서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가 아니므로 서면 계약서를 작성해야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는 예술인 개인은 더욱 복지 사각지대로 몰리게 된다. 서면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고용인에 대해 예술인 신문고에 신고할 수 있지만, 신고를 위해서는 예술 활동증명이 필요하다. 신고사건 분야의 경우 증명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자격에 미달되면 일회성 활동 증명이 가능한데, 이를 위해선 또 서면 계약이 필요하다. 서면 계약서를 작성해주지 않으면 증명 불가능으로 신고가 어려워질 수 있는 것이다. 

 

2020년 말, 예술인 고용보험 제도가 도입되었다. 반응이 뜨거운 가운데, 과연 실효성이 있는가에 대한 논란 또한 있었다. 도입된 예술인 고용보험의 전제 조건은 ‘근로자가 아닐 것’이다. ‘투잡’, ‘쓰리잡’을 뛰는 예술인의 경우 자기 일을 취사선택해서 보고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실업급여를 보장하지만 예술인 고용보험을 지급받으려면 ‘실업 전 9개월 이상 근로’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프리 프로덕션에 별도의 임금 책정을 하지 않는 공연 예술 분야의 경우, 단기 계약을 전전하는 예술인들의 경우에는(도급을 특례로 어느 정도 보장하고 있음에도), 실업급여 대상자가 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권리찾는 사람들

 

예술인도 노동자임을 인정하지 않는 앞선 수많은 부정에도 불구하고 예술인은 노동에 대해 알아야 한다. 노동법 보호 밖의 존재라고 낙담할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고 피력하기 위해 우리의 노동에 대해 정의해 볼 필요가 있다. 너무 막연하다면 나의 일터, 나의 일상에서 겼었던 문제들을 떠올려보는 데서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엄연히 노동을 제공하는 우리는 왜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하는지, 작업하다가 다쳤을 때 왜 산재 적용을 받지 못하는지, 도대체 왜 고용인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직장 내 괴롭힘’ 보호 조항의 적용을 받을 수 없는지, 현실과 괴리된 법 조항에 의문을 가져보는 것이다. 

 

“어떻게 먹고 살지.” 머리를 맞대고 같이 고민하던 친구들은 지금 아트 디렉터를 꿈꾸는 친구, 타투이스트를 꿈꾸는 친구, 갑자기 춤바람이 든 친구, 작가가 되기 위해 여러 지원 사업에 도전하는 친구, 스케일이 큰 작업을 위해 돈을 모으는 친구가 되었다. 나 또한 포기를 번복하고 생활 예술인으로서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지금의 목표는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처럼 백발노인 장수 작가가 되는 것이다. 잊을만하면 작업을 하나씩 내면서 살고 싶다. 우리는 앞으로도 어떻게든 길을 찾아 나갈 것이고, 미술이 너무 좋다고 생각한 각자의 기억을 품고 살아갈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권리를 찾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이미터

권리찾기유니온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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