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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찾는 사람들] ⑥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 | 칼럼

  • 2021-05-04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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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고 겁 많은 노동자로 살아남기

 

나는 겁이 많은 노동자였다. 때는 바야흐로 2017년. 그 당시 19살이었던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알 수 없는 패기로 혼자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이하 워홀)를 떠났다. 워홀은 나라 간에 협정을 맺어 청년들이 그 나라에서 여행도 하고 공부도 하고 일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뉴질랜드는 한국보다 시급이 높고 경험으로 대부분의 워홀러는 일을 한다. 뉴질랜드에서 일하면 보통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시티잡으로 도시에서 카페나 음식점에서 일하거나 아니면 시즌잡이라고 지역별로 과일을 재배하는 시즌이 있는데, 그 시즌에 맞춰서 농장에서 일한다. 마지막으로 공장에서 일을 할 수 있는데 대부분은 초록 홍합을 까는 공장에서 일한다. 

 

나 같은 경우는 한 달 정도 시간이 비어 아는 언니와 체리 농장에 일하러 갔다. 미리 이력서를 내고 취직하면 숙소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우린 이미 그 시기를 놓쳐 체리 농장이 많이 있다는 마을로 무작정 찾아갔다. 그 마을은 약 500명이 사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는데 체리 시즌을 따라 온 이주 노동자들을 위한 그 마을의 유일한 숙소는 북적북적했다. 그 마을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농장 노동자들을 그 숙소에서 머물렀다. 숙소 주인 할아버지는 일자리를 알선하고 차가 없는 노동자들을 위해 같은 방향으로 가는 노동자들을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

 

나는 어떻게든 일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고 다행히 첫 번째 일자리를 구했다. 첫 번째 일자리는 야외에서 하는 일이었다. 드넓은 체리밭에 심어져 있는 체리 나무 지지대를 세우고, 비료를 뿌리고 가지치기를 하는 일이었다. 땡볕에서 날카로운 뉴질랜드 자외선을 피하고자 꽁꽁 싸매고 일을 해야 했고, 매일 매일 9시간 반씩 묵묵히 노동했다. 차마 싸매지 못한 귀는 껍질이 벗겨져 따가웠다. 시즌은 바쁘기 때문에 주말도 없이 정말 매일 같이 일했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어느 정도 일하면 실내에서 하는 일에 배치해 주기로 약속하고 일했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물어보거나 따지고 싶어도 언어가 되질 않으니 말을 할 수도 없고, 결국 숙소 주인 할아버지와 작당 모의해서 몰래 실내에서 하는 일로 바꿨다. 우리가 그만둔다고 말하러 갈 때 어찌나 무섭던지. 숙소 주인 할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그 키 큰 백인 남성이 우리를 어떻게 대했을지 상상도 안 된다.

 

[사진] 어떻게든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구했던 첫번째 일자리. 땡볕이 내리쬐는 체리밭에서 매일 9시간 넘게 일해야 했다

 

뜨거운 실외보단 차가운 실내가 낫겠지 하고 잔뜩 기대를 품고 두 번째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두 번째 일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평균 9시간 동안 서서 끊임없이 몰려오는 체리를 통에 담아 박스에 차곡차곡 쌓는 일이었다. 체리는 물밀려 오듯 밀려왔고 컨테이너 벨트는 멈추지 않았다. 잠시라도 멈칫하는 순간 체리가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안 됐다. 여기서는 최대 12시간까지도 일했던 것 같다. 매일 5시에 일어나고 일 갔다 와서 저녁 먹고 다음 날 도시락을 싸고 씻고 12시쯤 자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 당시엔 그 노동을 노동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워홀에서만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여기가 한국보다 시급이 높으니 한국에서 일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외국인, 특히 아시안이라는 점을 이용해 나의 노동력을 착취한 것이다.  내가 머물렀던, 노동자들만 살았던 숙소의 90%는 아시안이었다. 간혹 있는 서구권 백인들은 용돈 벌이를 하기 위해서, 아니면 자신의 능률에 따라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했다. 백인들은 힘들어서 굳이 하지 않는 일이기에 말 잘 듣는 아시안들은 농장주들에게 최고의 노동력이었다. 두 농장 다 최저임금을 주며 교통비도 지원하지 않았고 심지어 식대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와 다음날 먹을 도시락을 싸야 했다. 당연히 연장 근무 수당은 주지 않았고 시즌 직업이었기 때문에 단기간 일하는 비정규직이었다. 그래서 언제든지 해고를 당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런 일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 언어가 통하지를 않으니 불만이 있어도 문제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매일 적어도 9시간이 넘게 일하니 우울해지고 몸도 아팠었다. 겨우 한 달의 시간이지만 정말 힘든 시간이었다.

 

[사진] 하루에 11시간, 12시간이 넘게 일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다음 해 뉴질랜드에서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햄버거 체인점에서 일했는데 주 5일 8시간 반씩 일했다. 꽤 바쁜 매장이었는데 단 두 명이 일을 했다. 나는 잡다한 일을 다 맡아야 했다. 포스기로 주문받기 뿐만 아니라 음식 세팅하기, 전화 받기, 다 먹은 자리 치우기, 음료 만들기, 6분 이내로 튀기는 음식(감자튀김, 치킨 너겟, 팝콘 볼 등등) 튀기기 등등 한사람이 감당하기에 많은 일을 해야 했다. 주휴 수당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말하는 게 겁이 나 받지 못했고 연장 근무 수당도 당연히 받지 못했다. 집에 오면 녹초가 되어 겨우겨우 밥을 챙겨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약 6개월을 일했다.

 

 

당당한 노동자로 우뚝 서기 위해

 

내가 받아야 하는 돈,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음에도 무서워 얘기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게 내 권리인 줄 몰랐다. 괜히 이야기했다가 잘릴 거 같고, 아니면 눈치를 줘서 불편하게 만들까 봐 무서웠다. 뉴질랜드에서 당한 노동 착취는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한국보다 낫다는 환상으로 포장되어 이게 문제인지도 인식하지 못하게 했다. 돈을 벌기 위해선 이렇게 일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그 노동들이 한이 되어서 그런지 지금 노학연대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노조에도 가입했다. 투쟁사업장을 다니고 공부를 하며 정당하게 노동의 대가를 받고, 최저임금을 받으며 장시간 노동하지 않을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노학연대 활동을 하면서 투쟁하는 동지들을 통해, 같이 하는 학생들을 통해 내 권리가 무엇이고 노동자는 당당하다는 것을 배웠다. 하지만 막상 내가 다시 노동자가 되어 부당한 상황에 맞닥트리게 된다면 과연 내가 거기서 내 권리를 외칠 수 있을까? 노동자 개인은 여전히 힘이 약하고 겁먹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면 든든한 동지들이 필요하다. 그 당시 나는 노동 문제들을 오롯이 혼자 마주해야 했다. 하지만 나와 함께 싸워줄 노동조합이나 노동문제에 관심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을 거다.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게 해주고 연대할 수 있는 기반이 꼭 필요하다. 그러니 우리 서로가 서로의 동지가 되자. 용기가 되자.
 

 

 

글·사진

권리찾기유니온 조합원 /

성공회대 노동자문제 해결을 위한 학생모임 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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