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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찾는 사람들] ⑤ 그의 문제가 그만의 문제로 남지 않기 위해 | 칼럼

  • 연자
  • 2021-04-27 14:40
  • 5,596회

 

대학 새내기 시절 가벼운 마음으로 떠난 ‘농활(농민학생연대활동)’의 첫날밤, 익산 어느 마을의 이장님이 들려준 이야기가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다. 우리가 이렇게 며칠 동안 만나는 게 어떤 의미인 것 같은지 질문하시더니, 학생들이 단순히 농사일을 거드는 게 끝이 아니라 여기 사는 사람들과 통성명을 하고, 이 지역의 모습과 이곳에 사는 이들을 담아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동네의 사람들 역시 우리의 얼굴과 목소리를 기억할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혹여나 서로의 지역에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신문이나 TV를 통해 소식을 보면 단숨에 지나치지 말고 서로 한 번 더 유심히 살펴보자고 덧붙였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런 의미인 것 같다. 성긴 연결일지라도, 그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의 얼굴과 목소리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의 문제가 그만의 문제로 남을 수 없게 되는 것이지 않을까. 그 짧고 어설픈 시간을 계기로, 나는 처음으로 나와 다른 땅을 딛고 있는 누군가와 연결되는 감각을 새겼다. 

 

단절에서 연결로

 

그때 이해한 ‘연결’의 가치를 처음으로 실천한 공간이, 내게는 학교였다. 한국의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은 여전히 녹록지 않은데, 연세대학교 역시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2008년 이후로 학내 노동자의 투쟁이 끊이지 않은 곳이다. 법 테두리 밖의 노동을 하던 노동자들은 최저임금 보장 투쟁, 생활임금 투쟁을 벌였고, 때로는 인원 감축을 반대하기 위해, 부당한 해고를 막기 위해, 안전한 일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학교 곳곳에 모였다. 나 역시 학교를 오가며, 교정 가로수에 걸린 현수막을 자주 보았다. 반듯하고 화려한 폰트로 꾸며진 현수막과 다르게, 검은색 붓글씨로 한 획 한 획 거칠게 쓰인 현수막은 단연 눈에 확 띄었다. 따끔하게 학교의 책임을 묻고 묵직하게 노동자의 외침을 눌러 담은 현수막들이었다.

 

[사진] 2020년, 연세대학교 백양로의 현수막 Ⓒ연자

 

 

2019년에는 노동자의 권리를 짓밟고, 차별적 대우와 폭력적 언행으로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악질 용역업체를 퇴출하기 위한 학내 투쟁이 있었다. 해당 업체는 노동조합 소속 노동자들에게 대가 없는 추가 노동, 강도 높은 노동을 강요했을 뿐 아니라, 녹음기와 카메라를 켠 채 집요하게 노동자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였다. 학교는 늘 이러한 문제에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했다. 늦게나마 해당 문제를 인지하고 관심을 기울였을 때, 용역업체의 만행 그 자체도 충격이었지만, 그런 일들이 학내에서 몇 개월 동안 지속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의 심각성을 알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충격도 그에 못지않았다. 학생과 노동자의 거리가 새삼 아득해 보였고 내게 투쟁은 낯선 단어 같았다. 매일같이 공간을 나누어 살아가는 관계임에도, 학교 안에서 노동자와 학생이 서로를 온전히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날 이후, 학내 노학연대 단체, ‘비정규 노동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에 가입해 졸업할 때까지 활동했다. 앞서 언급했던 업체는 다행히 다음 해에 퇴출되었지만, 그렇다고 근본적인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작은 승리를 함께 경험했으니, 이를 기반으로 앞으로 더 싸워나가자고 다짐했다. 뿌리 깊은 차별과 불평등을 뽑아내고자,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만들고자 우리는 함께 구호를 외치고 서로가 서로의 용기가 되었다.

 

 

그의 문제가 곧 나의 문제가 되고,

 

연대해서 함께 싸운 경험은 분명 강하고 힘 있는 기억이 되었지만, 내겐 그보다 각자의 일상을 나누고 서로의 존재를 알아간 기억이 더욱 크게 남아있다. 투쟁 현장에서도, 우리는 바닥에 앉아 서로의 삶을 자주 나누었다. 농성장에서는 쪼그려 앉아 식사하며 서로에게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기도 했다. 오전 근무하는 분에게 오늘 출근은 어땠는지 묻고, 곧 어떤 학생이 실천하고 있는 비거니즘(veganism, 동물권을 옹호하며 동물 착취와 종 차별에 반대하는 철학)에 관한 질문이 돌아오는 식이었다. 먼 것 같았던 사이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서로 달라 이해할 수 없던 지점들이 줄어드는 듯 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함께하며 그의 문제가 곧 나의 문제가 되고, 나의 문제가 다시 그의 문제가 되는 경험을 하였다. 노동자들끼리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아프다던 곳은 요즘 어떠냐, 무슨 병원에 가면 평일에도 몇 시까지 진료해준다더라, 오랫동안 함께 일하고 싸우며 쌓인 관계 위에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계속 들여다보았다. 더운 날에도 이어진 집회에서도 슬며시 내민 과자 하나, 음료 하나는 지친 사람 없이 왁자지껄하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천천히 스며들며 서로를 끊임없이 이해하고 알아가고자 하는 시간으로 가능한 일들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관계들이야말로, 지치더라도 툭툭 털고 다시 힘을 내 싸울 수 있는 원동력이지 않을까, 싶었다.

 

 

누군가의 문제가 그만의 문제로 남지 않을 수 있기를

 

세상은 여전히 퍼석하고, 기본적인 권리조차 지켜지지 않는 곳이 아직 많다. 때로는,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연속해서 나를 덮친다. 연세대학교 노동자들은 여전히 인력 미충원으로 인한 높은 강도의 노동을 수행하고 있으며, 인원 감축과 임금동결에 맞서 점심 선전전을 이어나가고 있다. 한편, 여의도 LG트윈타워의 청소노동자들은 2020년 여름부터 싸우고 있다. 처음에는 고용 승계를 외쳤는데,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해고를 당한 이후에는 원직 복직을 요구하고 있다. 아시아나케이오 청소노동자들도 노동조합을 만들자 집단 해고를 당했고, 원직 복직을 위한 무기한 단식을 하고 있다.

 

학교든, 기업이든, 사회든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 부딪혀야 하는 대상이 너무 커다래서 싸울 엄두조차 나지 않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 연결의 감각을 한 번 더 떠올리려 보자. 서로의 일에 한 번이라도 더 신경을 쓰는 이들이 있기에, 서로의 손을 놓치지 않고 싸우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우리는 쓰러지지 않으리라 믿는다. 나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우리가 되었을 때라면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때로는, 나를 아는 누군가가 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힘이 나기도 하니까. 그렇게 얻은 힘으로 끈질기게 싸워나가 결국 함께 무언가를 쟁취하고 지켜낼 수도 있으니까. 각자,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이 많아지기를, 그래서 누군가의 문제가 그만의 문제로 남지 않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연자

연세대학교 비정규 노동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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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LG트윈타워 내부 농성장 모습 ⒸLG트윈타워 공대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