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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유하는 사람들] ⑦ 이상진 "나는 되게 쉬운 놈이에요." | 사람

  • 김우
  • 2020-11-02 17:13
  • 8,985회

“아구 우리 도롱이(도령이) 왔나?” 친척들에게 별명이 이 도령이었다. 부산에서 누나 둘 밑으로 태어나 ‘귀한’ 아들 대접을 받아서였다.

그렇다고 무언가 풍족하고 유복함을 누리고 자란 건 아니었다.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어머니는 배운 사람이었지만 아버지는 ‘매 놀고 학교도 다니다 말다’한 사람이었다. 동네서 찍어 놓은 규수를 납치해서 반강제 결혼을 한 탓에 부부 사이에 늘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돈은 안 벌어오면서 술과 친구만 좋아하고 때론 가족에게 폭력까지 일삼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자랐다.

 

5년 전 아버지의 췌장암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병이 깊어 투병 생활은 10개월이 채 안 됐다. 힘없고 야윈 아버지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진아, 집에 가서 자라.” 아버지의 병상을 지키며 졸던 새벽녘이었다. 가족들 병원에서 그만 힘들어하라는 말씀이었을까. 아버지는 그렇게 아침에 떠났다.

 

유품 정리할 때 옷에서 무언가 툭 떨어졌다. 단 하나의 스탬프도 찍히지 않은 여권이었다. 아무것도 찍혀있지 않은 여권에 고스란히 담긴 건 여행을 가고 싶던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거기에 동남아 한 번 보내 드리지 못한 아들의 후회가 선명하게 더해졌다.
‘나를 억수로 좋아한 사람’ 하지만 난 싫어하고 적개심까지 품었던 사람, 아버지. 이제는 보고 싶고 그리운 사람, 아버지다.

 

유년 시절은 크게 사고 안 치고 평범하게 지냈다면 사춘기 때는 좀 놀았다. 서면 유흥가 나이트클럽으로 진출했다.

유행하는 구두를 닦아서 신고, 머리엔 요구르트를 발랐다. 비싼 포마드 대용이었다. 요구르트를 물에 타서 머리 모양을 만들면 그대로 굳으며 반질반질 윤까지 났다. 단점이라면 머리에서 요구르트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사진 1]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 아래위 흰옷으로 깔맞춤하고 이상진

 

퇴학당할 뻔한 사건도 있었다. 비 오는 날이었다. 영어 선생이 맨 뒤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이상진에게 분필을 던졌다. 피했더니 장우산을 날렸다. 그대로 맞았더라면 크게 다쳤을 일이었다.

‘꼭지 열려서’ 나무 의자를 집어 들고 교단 앞으로 뛰어가 칠판에 던져 버렸다. 의자는 박살이 나고 칠판은 구멍이 나고 친구들은 웅성거리는 교실을 그냥 나와 버렸다.

뒷일을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교무실에 꿇어앉아 빌어 1주일 정학으로 바뀌었다.

 

노동조합 제대로 하기 위해서

 

군 제대 후 ‘코리아 나일론’ 생산직으로 들어갔다. 96년이었고 28살이었다. 열심히 일했다. 내 일을 마치면 다른 사람 일까지 도왔다. 광이 번쩍번쩍 나도록 청소도 열심히 했다.

사실 공장에 다니기 싫어서였다. 위험하고 힘들어 하루에도 열두 번 그만두고 싶었다. 시간이 빨리 가도록, 힘겨움을 까먹을 수 있도록 오히려 일에 매달렸다.

“쟤 좀 이상하다.” 등한시하던 이들도 시간이 갈수록 이상진을 인정하게 됐다. 코오롱 대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술을 못 마시는 체질을 공장에 다니며 바꾸었다. 콜라만 마시며 멀뚱하게 앉아있는 것도, 소주 1잔밖에 못 마시는 것도 ‘가오’가 떨어지는 일이었다.

토하고 얼굴이 하얗게 돼서도 다시 마셨다. 집인 줄 알고 주차장에 뻗어서 자기도 했다. 2차나 3차로 노래방에 가면 영락없이 졸아서 마이크 한 번 잡아보지 못해도 비용은 줄기차게 ‘뿜빠이’를 하는 나날이었다. 

 

노조 활동은 또 노동 운동은 사람을 만나는 사업이었다. 사실 이런 술 단련은 노동조합 제대로 하기 위해서였다. 
내 것만 보다가 입사 4년 차가 돼서 노조를 알고 전체를 보니 엉망이었다. 공장에 노조는 있었지만, 사측 입장을 대변하며 인원 구조조정에 도장 찍어 임금 조금 올리는 것과 맞바꾸는 노조였다.

그렇게 ‘비비는 사람들’은 편한 일만 했다. 출근해서 커피 마시고 수첩 들고 게이지 체크하면 끝이었다. 나머지는 ‘쌩 노가다’였다. 

 

국소배기장치도 없이 공기 중에 기름이 날려서 뿌옇고, 너무 시끄러워서 귀마개가 필수인 현장. 코 수술과 귀 수술이 예사였다.

바지 둥둥 걷고, 눈에 땀 들어가지 않게 이마에 끈 질끈 동여매야 했다. 무거운 거 빼내느라 허리가 부러지고, 고속 회전체에 손가락 잘리기 일쑤였다.

‘짜고 치고, 손 비비는 사람들 그 꼬라지 못 보겠다’는 생각으로 대의원으로 나갔다. 공약까지 마련해서 맨 밑에서 치고 나갔다.

 

대의원이 되고, 문제를 제기해 바꿔냈다. “니가 되고 나서 변화가 오는구나.” 조합원들이 즐거워하고, 칭찬을 먹고 사니까 힘든 일이 없었다.

샤워장도 만들고, 탈의실도 만들고, 사비를 들여 드라이기와 로션까지 구비했다. 화장실에서 기름기 정도나 털고 나가던 것을 말끔하게 씻고 사복 갈아입고 향수 냄새 풍기며 퇴근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우리도 이거 해도.” 공장 전체에 소문이 나서 다른 부서에서 견학을 올 정도였다.

노동조합의 가치를 느꼈다. 안전 문제도 제기했다. 국소배기장치를 늘려 현장이 맑아졌다. 각종 낡은 기계를 바꾸었다.

동료들이 제일 좋아한 건 업무 순환이었다. 기득권층의 반대는 심했지만 ‘공평하게 돌자’는 것은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기심의 자리에 단결력이 자리 잡았다. 

 

[사진 2] 부서별 팀 대항 축구선수로 활약하다.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이상진 이상진

 

한편 회사는 끊임없이 정리해고를 했다. 돈 안 되는 부서를 조금씩 조금씩 구조조정을 하며 일자리를 잠식해 왔다.

싸우지 않으면 모두의 미래가 될 거라는 우려가 현실로 드러났다. 이상진의 부서는 그대로 밀려나지 않았다. 싸웠다. 현장을 조직했고, 다른 부서와도 연대했고, 노조 집행부를 압박했고, 신규 프로젝트 유치 등의 대안을 제시했다.

 

2003년엔 구조조정 저지 고용유지 투쟁을 했다. 64일 전면 파업이었고 고용유지 확약을 받았다.

하지만 회사는 3개월 뒤 그룹사 전체 구조 조정을 발표했다. 희망퇴직이란 이름의 강제퇴직을 받았다. 부서별 할당량이 있었고, 입바른 소리 하는 노조원을 딱딱 찍었다.

1달 만에 600명을 받았다. 지금 나가면 위로금도 주고 비정규직 일자리도 주겠지만 버티면 10원도 주지 않고 바로 정리해고라는 협박에 사람들이 나가떨어졌다.

 

추스르려 했지만, 조합원들은 쟁의 찬반 투표함조차 피했다. 투쟁 조끼를 입는 것도 힘들다는 민원으로 노조는 투쟁 조끼를 벗는 결정까지 내렸다.

무너졌다. 2차 희망퇴직이 줄을 잇고 회사는 원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얻었다. 

 

해고 노동자로, 마당쇠로, 구원투수로 살다

 

분명한 건 노조가 양보한다고 회사의 칼날을 비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임금 30%까지 양보해도 회사는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아예 노동조합의 뿌리를 뽑겠다고 나섰다. 78명의 정리해고가 이어졌다.

2005년 2월 21일. 10년 해고노동자 투쟁의 시작일이었다.

 

용역 깡패 150명이 상주하고 매일 고소 고발이 난무하는 상황. 정리해고를 막지 못하고 사퇴한 노조 위원장 보궐 선거에 후보를 냈고 과반을 넘겨 이겼다.

하지만 ‘3일 천하’였다. 회사는 선관위원을 매수해 무효화시켰다.

 

밖으로 쫓겨나고 진입 투쟁을 하고 피 터지게 격렬했던 시간에도 노동부는 깜깜 언론도 침묵이었다.

철탑 투쟁에도 교섭을 성사하지 못했고 본사 점거 투쟁, 이 용렬 회장 집 점거 투쟁을 벌였지만 경찰 혹은 경찰특공대에 진압당했다.

지역 공장 출퇴근 투쟁, 상경 투쟁, 과천 본사 집중 집회 등을 이어갔다. 이상진은 민주노총 화학섬유연맹으로 파견돼서도 연계해 투쟁했다.

 

하지만 오랜 투쟁에 장사는 없었다. 생계투쟁으로 대리운전을 하던 동지마저 사고로 잃고, 마지막으로 남은 인원은 11명이었다.

2014년. 거리의 싸움 10년에 지쳤지만 본사에 모여 끝장 투쟁을 결의했다. 위원장의 단식과 연대 대오의 투쟁 속에 교섭에 들어갔다. 
명예 복직을 해서 하루라도 회사에 들어가 마무리를 하자고 했지만 성사하지 못한 것이 제일 아쉽다. 대신 회장이 직접 나와서 사과하는 것을 관철했다. 

 

이상진은 코오롱의 현장으로 돌아가진 못했지만, 자신이 느끼고 배운 것을 세상을 바꾸는데 일조하는 활동가로 자리매김했다.

민주노총 비대위원을 맡고 있는 이상진은 화학섬유연맹과 민주노총 임원으로 14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았다.

민주노총은 위원장 선거를 앞두고 있다. 민주노총이 계급성, 전투성, 민주성, 변혁성, 연대성의 퇴색이 없길 바란다. 

 

새 집행부가 꾸려지면 그이는 이제 부산의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사람들이 그런 시간을 길게 허락할 것 같진 않지만 일단 쉬고, 고민하고, 뒤돌아보는 시간을 보내려 한다. 

 

[사진 3] 화학섬유연맹과 민주노총 임원으로 14년을 살았다. 바로 지난주 집회에서  ⓒ 이상진

 

우연히 합석한 뒤풀이 자리. 배성인(학술단체협의회 운영위원장)은 이상진을 정파를 따지지 않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운동의 원리원칙만 따지고 지키려는 마당쇠라고 정의 내린다.

임순광(한국비정규교수노조 전 위원장)은 현장 중심주의와 계급적 원칙을 지키는데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이 위기 상황 구원투수로 살아온 게 이상진이라고 증언한다. 

 

“나는 되게 쉬운 놈이에요.” 이상진은 복잡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불구덩이에 짚불을 들고 뛰어드는 사람으로 자평한다. ‘놈놈놈’으로 풀이한다면 단순한 놈, 계산하지 않는 놈, 결단하는 놈이다. 이상진의 제2 인생 설계가 기대된다.

 

 

[사진 4] 광안리 포장마차 '감포집'에서. 소주 딱 한 잔에도 헤롱댔다던 고교생의 앳된 모습이다. ⓒ 이상진

 


김우
권리찾기유니온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