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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노동자에게 존중과 배려를 | 현장

  • 이정호
  • 2020-10-12 15:09
  • 6,477회

갠 로치 감독의 영화 ‘미안해요, 리키’(2019)에서 관리자 멀로니는 택배기사로 일하는 리키에게 수시로 “당신은 우리를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일하는 자영업자”라고 말한다. 리키가 근무 중 강도에게 폭행당했을 때도 멀로니는 리키가 자영업자라는 걸 강조한다. 

 

리키는 하루 10시간 넘게 일하면서도 노동자가 아닌 ‘가짜사장’으로 위장된 신세다. 회사는 리키에게 최소한의 노동권도 보장하지 않는다. 멀로니는 리키가 입원했는데도 파손된 단말기 값을 언급한다. 밥 먹고 화장실 갈 시간조차 용납하지 않는 ‘배송 위치 추적’과 파손된 물품에 배상 책임까지 떠안은 리키는 폭행당해 퉁퉁 부은 얼굴로 택배차를 타고 출근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가짜사장’으로 위장된 노동자는 영국에만 있지 않다. 대기업 ‘LG’란 글씨가 선명한 근무복을 입고 가정방문을 통해 한 달에 200개 이상의 정수기, 공기청정기 등 LG전자 가전제품을 유지, 점검하는 4000여 명의 LG케어솔루션 매니저도 대부분 가짜사장(개인사업자)으로 분류돼 고용안정, 시간외수당, 연차휴가, 4대 보험, 퇴직금 등 노동기본권을 모조리 박탈당한 특수고용노동자로 일한다. 

 

ⓒ금속노조

 

LG전자는 계열사인 하이엠솔루텍에 제품 유지보수 서비스를 맡겼다. 하이엠솔루텍엔 케어솔루션사업부와 에어솔루션사업부가 있다. 케어솔루션사업부는 주로 가정을 방문해 정수기, 건조기 등 렌탈제품을 유지보수하고, 에어솔루션사업부는 주로 기업을 대상으로 해 냉난방기나 공조기 등을 유지보수한다. 케어솔루션에만 4000여 명이 일하는데 이들 모두가 개인사업자다. 반면 에어솔루션사업부에서 일하는 1300여 명은 정규직 노동자다. 

 

케어솔루션사업부를 중심으로 지난 5월 금속노조 산하 LG케어솔루션지회가 결성됐다. 지회엔 하이엠솔루텍의 정규직인 에어솔루션 엔지니어와 공조서비스 담당 노동자도 가입했다. 

 

회사가 지난해 10월 정수기 설계 결함으로 인한 하자를 케어솔루션 매니저들에게 건당 3000원을 주면서 떠맡겼다. 매니저들이 본래의 유지관리 업무가 아닌 A/S업무를 매니저들에게 헐값이 떠넘긴다며 분노했다. 분노한 매니저들은 밴드 방을 만들어 단시간에 1700여 명이나 가입해 정수기 부품 교체작업을 거부하기도 했다. 회사는 건당 수수료를 3000원에서 5000원으로, 다시 1만원으로 인상하면서 매니저들 불만을 잠재우려 했다. 

 

매니저들은 밴드 안에서 처우개선을 위해 노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노조설립을 준비했다. 회사는 밴드 안에서 적극 여론을 주도했던 밴드장과 매니저들에게 계약해지를 압박하고 밴드 탈퇴를 요구했다. 본사는 밴드장이 바뀔 때마다 누군지 알아내 연락하고, 사무소 소장들은 “본사가 감시 중이니 밴드를 탈퇴하라”로 공지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밴드 안에서 적극 목소리를 냈던 두 사람이 계약해지 당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지난 5월 노조 설립 때 사무장과 수석부지회장이 됐다. 

 

LG 케어솔루션 가정방문 노동자 보호 캠페인 배지 ⓒ금속노조

 

케어솔루션 매니저들은 근로계약서가 아닌 업무위탁계약서를 쓰고 일을 시작한다. 지역별 사무소에 배치된 매니저들은 소장과 팀장의 지시를 받고 주 1회 지역 사무소로 출근해 회의나 보수교육도 받는다. 하루 8~10가정을 방문하는 매니저들은 한 달에 200계정 이상을 처리한다. 4000여 매니저 가운데 200명 남짓한 남성을 뺀 대부분이 40~50대 여성이다. 

 

밴드 장으로 활동했다가 계약해지 당했던 김진희 수석부지회장은 아이 둘을 키우며 독박육아를 하다가 지난해 5월 교육을 받고 LG전자 케어솔루션 매니저가 됐다. 김 수석부지회장은 노조가 지난달 회사의 교섭 회피 등 노조탄압을 기자회견으로 고발한 뒤 9월18일 경기지노위 화해중재로 회사와 복직에 합의했다. 

 

지회는 지난 5일부터 ‘방문노동자에게 존중과 배려를’이라고 적힌 배지나 리본을 달고 가정방문 노동자 보호 캠페인을 시작했다. 지회는 노조 결성 전부터 이용해온 밴드 안에서 500명이 직접 참여한 설문조사를 거쳐 해당 문구를 선정했다. 

 

금속노조 LG케어솔루션지회 조합원들이 가정방문노동자 보호 캠페인 배지를 달고 회의중이다. ⓒ금속노조

 


이정호
권유하다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