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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현모양처

  • iron
  • 2020-10-21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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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밀하게 계획하는 일 없이 사는데 돌아보니 나름 주도면밀하게 준비했던 일이 있다. 신혼집의 가구 배치였다.

집을 구할 돈은 사천만 원이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지 않으려 외곽으로 한 정거장씩 후퇴했다. 남편과 여러 차례 전철에서 내려서 복덕방에 들러 같이 둘러보다 다시 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강동구 길동에 방 두 개인 집을 구했다. 욕실 하나와 부엌 겸용 거실도 있었다.

 

방 하나에 침대와 옷장과 서랍장과 텔레비전과 전화를 놓는 것은 보편적이었다. 내가 치중한 것은 맞은편 작은 방이었다. 이사 전부터 어디에 콘센트가 있는지 확인해서 스케치까지 해두었다.

남편이 일어나서 욕실에서 씻은 뒤엔 다시 안방으로 돌아오는 일이 없도록 동선을 짰다. 작은 방에 남편의 모오든 것을 놓았다. 옷과 넥타이를 넣은 옷장, 속옷과 양말이 들어있는 서랍장, 서류 정리 등을 할 책상, 그 옆에 전신 거울과 드라이기까지.

결혼 전부터 일찌감치 이야기해 둔 것도 있었다. 

나랑 결혼하면 아침은 없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저녁형인 내 삶에 지장 받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앞치마를 입고 보글 찌개 김 모락 밥상을 차려 놓고 자는 남편을 깨우는 일, 넥타이를 매주고 어깨의 먼지를 탁탁 털어주는 일, 잘 다녀오라고 꼬옥 안아주며 볼에 쪼옥 입맞추는 일. 드라마에 질리도록 나오는 이런 장면을 연출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술 마시는 게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영업사원 남편이 지각을 두어 차례 했을 때였다.

나 아침에 깨워주면 안 돼? 넌 다시 자면 되잖아.”

출근은 니가 하는 거지.”

나는 거절했고. 남편은 한두 번 더 지각하고 회사에서 깨졌는지 그 이후로 결코 지각하지 않았다. 새벽 4시에 들어와도 아침에 알아서 나갔다.

출장은 니가 가는 거지정신으로 출장 때 가방을 꾸려준 적도 없다. 내 양말, 내 손수건이 어딨느냐고 절대 물어볼 일 없도록 작은 방 서랍에 분리해 주었을 뿐이다.

 

생각나는 이야기 하나.

어떤 사람이 커피를 타고 있었대요. 근데 커피에 크림을 쏟아부었대요. 보던 사람이 간섭하자 따귀를 짝 때리며 말했대요. '커피는 내가 타는 거지.’ 두 번째 얘기도 해줄게요. 어떤 사람이 김치를 담그고 있었대요. 근데 배추에 고춧가루를 들이부었대요. 보던 사람이 참견하자 역시 따귀를 짝 때리며 말했대요. ‘김치는 내가 담그는 거지.’ 그럼 이번에 네 번째 이야기...”

그러자 듣고 있던 선배가 걸려들었다.

세 번째 얘기야.”

나는 선배의 턱이 돌아가게 따귀를 짝 때리고 말했다.

얘기는 내가 하는 거지.”

 

총학생회실이었고, 난 갓 2학년의 홍보부 차장이었고, 선배는 복학한 4학년 복지부 부장이었고, 당시엔 예비역 4학년 선배라 그러면 까마득한 하늘과 같은 존재였다.

과묵하고 근엄한 편이었던 선배답게. 따귀를 맞은 볼에 손을 올리고 입을 벌린 채 아무 말 없이 눈만 끔벅거릴 그때. 잽싸게 도망치며 말했다.

그럼 전 바빠서 이만.”

 

출근이건 출장이건 성인이라면 주체성을 가지고 스스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때 장래 희망 빈칸에 현모양처라고 적었던 건 분명히 기억한다.

 

내가 상상하는 건 이런 거였다. 나는 흔들의자에 앉아 아기의 털양말을 뜨개질한다. 남편은 목수로 설정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집에서 24시간 내내 함께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내가 남편이 만든 흔들의자에 앉아 있다면 아기는 남편이 만든 흔들 요람에서 자고 있고. 남편은 아기가 크면 탈 목마라도 다듬고 있다가 직접 깎은 찻잔에 차를 타서 건네는 거다.

서로 마주 보며 눈으로도 웃고 입가로도 웃고. 은은한 볼웃음 짓는. 뭐 그런. 지금 생각하면 팔뚝의 닭살을 쓸어내려야 할 풍경을 그렸었다.

 

지나고 보니 당시 생각했던 현모양처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역시 현모양처의 삶을 살았다는 자평을 한다. 무엇을 해주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서 남편과 아이들에게 키워준 독립심과 자립심이 크니 말이다.

아이들에게 '네 곁에 내가 있다'는 메시지와 응원 외 해준 것은 하나도 없지만. 아이들이 '엄마가 우리 엄마라서 다행'이라고 얘기해주니 됐다.

 

나이 든 남자의 스트레스 1위는 배우자 사별이라고 한다. 늘 곁에 있을 것만 같던 사람이 없는 것의 안타까움도 크겠지만. 그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부족함에서 허전함이 더 커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에 더해지는 그 사람이 해주던 일에 대한 그리움. 빨래하고 널고 개켜서 갈무리하고, 씻고 다듬어 요리하고 설거지하고, 정리하고 정돈하고 쓸고 닦고... 일상을 살아가는 능력을 모두 내어 맡겨 놓았다가 그걸 맡았던 이의 부재를 맞이하면 그 상실감이 얼마나 클까.

 

우리 집엔 그런 걱정이 없다. 존재감 없는 아내와 존재감 제로인 엄마. 지금 당장 몇 날 며칠 여행을 떠나도 된다. 출발하며 그냥 가족 카톡방에 알리기만 하면 된다.

곰국을 끓여놓을 일이 없는 것은 평소에도 안 하던 걸 여행가며 이벤트처럼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며칠 전 오십견 치료로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부항을 뜨고 나오던 길이었다.

이제 저녁하러 가시나요?”

얼버무려도 되겠지만 솔직한 게 특징이라 말했다.

아녜요. 아이들이 다 커서 자기들이 알아서 먹어요.”

몇 살인데요?”

“19, 17살 그래요.”

아직 학생인데...”

저보다 잘하는 걸요. 전 요리 못 해요.”

에이 농담도. 요리 못 하는 주부가 어딨어요. 차암 겸손하시다~

더 할 얘기는 없어서 '은은한 볼웃음' 지으며 나왔다.

 

사실 현모이자 양처하기가 쉬웠던 것만은 아니다. 혹독한 내부 검열과 무성한 뒷말과 반복되는 사회적 비난에 맞서는 치열한 시간이었음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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