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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 iron
  • 2020-10-15 18:17
  • 3,477회

지난 토요일 구미 결혼식에 갔다. 애초 무박 2일로 마시고 첫차를 타려던 작심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 해설 전시 참가 일정이 잡혀서 마지막 기차를 예약하고 내려갔다. 뭐 아쉬움을 남기며 일어서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뒤풀이 자리에 함께한 열 명 남짓 경상도 노동자들은 오지게술을 잘 마셨다. 이이는 말술을 마시고, 저이는 주량이 소주 9병이라 했다. 거기에 함께 투쟁한 사이의 일치단결력이 빛났다.

 

연신 를 외쳐댔다. ‘무그라’, ‘무라마저도 축약한 ~!’마시자~!’는 뜻이었다. 나는 이럴 때 약한 모습 보이지 않으려 오버한다. 잔을 부딪쳐오면 보란 듯이 잔을 비우는 식. 뒤처지지 않으려 분발했고, 정신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달까.

 

치사량을 마셨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기차역엔 늦지 않게 도착했다. 계단을 내려가니 나를 태우고 갈 기이다란 기차가 얌전히 철로에 놓여 있었다.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그만 기차를 놓쳤다. 아니 기차가 나를 두고 떠나 버렸다. 나름 시간을 확인하고 잠시 의자에 앉아 발개졌을 얼굴 차가운 밤공기에 식힌 뒤 이제 타야지 했을 때 기차가 출발해 버린 것이다.

 

기차 옆을 천천히 걸어서 타야 할 칸으로 이동. 원하는 칸 앞에 딱 섰을 때 문이 딱 닫혔다. 다다다 뛰어서 헉헉거릴 상황이었다면 바로 기차에 올라타고 거기서 자리로 이동했을 텐데. 내가 보고만 있으면 기차가 내내 그 자리에 있을 것처럼 너무 여유를 부렸다.

 

(달려와서 다급하게) “왜 안 타셨어요?”

(사실 그대로) “타려고 했는데 막 문이 닫혀서요.”

 

아주 담담한 얼굴로 나는 뒤돌아섰지만 나의 허무한 마음 가눌 길이 없네.’의 심정으로 홀로 된다는 것을 느꼈다.

역무원이 더 안타까워하며 들고 있던 기기로 다른 열차를 빠르게 검색해 주었다. 표를 취소하고 동대구역에서 갈아타는, 새 표를 끊는 것도 도와주었다. 색연필로 표에 동그라미를 치며 열심히 설명해 주는 모습에선 길 잃은 양에 대한 사명감마저 느껴졌다.

 

살면서 문득 기차를 떠올리면. ‘슬픔은 간이역의 코스모스로 피고라는 가사가 기억나거나.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에 키 작은 소나무 하나라는 노랫말이 생각나기도 한다. 기차는 낭만이라는 이름의 이음동의어.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어서 수업을 째고 동기들과 강릉으로 가기도 하고. 백마역에서 술 마시다 선배들과 즉흥적으로 부산으로 떠나기도 하고. 계획에 없던 일출을 보러 가자며 늦은 시간 정동진역으로 출발하던 날들. 충동 여행지엔 모두. 기차가 나를 데려다주었다.

 

서울역 시계탑 앞에서 만나 근처에서 놀려던 친구들과 갈래?’ ‘그래, 가자~’ 아무 준비 없이 지리산으로 출발했던 날이 압권이다.

한겨울. 그냥 옷이었고 그냥 신발이었다. 물론 등산 관련 장비도 하나 없었다. 장갑이 없는 친구도 있어 사이좋게 한 짝씩 나눠 꼈다.

 

웃으며 장난처럼 등반을 시작했지만, 체력은 의욕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가자고 처음 발동을 걸었던 친구가 제일 힘들어했다. 노고단 산장에서 하루 자고 내려오자며 부축해서 힘겹게 올랐는데. 컵라면이나 초코파이류를 사 먹을 걸 기대했던 산장에선 이렇게 준비 없이 와선 안 된다며 바로 내려가라고 했다.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앉아 쉬지도 못하고 날 저물기 전에 내려가라는 재촉에 쫓겨 내려왔다.

그다음 기억은 녹초가 돼서 대합실 벤치에 누워서 기차를 기다리던 거다. 박스 한 장을 깔고 안 깔고 차이가 엄청나고, 신문지 한 장을 덮고 안 덮고 차이가 크다는 걸 실감한 시간이었다.

 

이번에 기차를 놓치면서 내 오래전 실수도 상기됐다. 결혼 전이었고 20대 중반 때였던 듯.

군에 간 동생을 면회 간 길이었다. 꼬박꼬박 면회 올 여자 친구가 없는 동생에게로 측은지심 누나의 발걸음이었다. 잘 먹고 잘 마시고 기차역 배웅을 마친 동생은 부대 복귀를 했다.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자면서 가면 되니까 많이도 마신 날이었다. 눈을 뜨니 빈 객차에 청소노동자 아주머니 한 명이 대걸레를 들고 올라오고 있었다.

 

한데 서울이 아니었다. 반대 방향의 기차를 타고 생전 처음 와보는 곳에 당도해 있었다. 시골 역사. 밖은 깜깜했다. 내 머릿속도 깜깜해졌다.

 

매표소 안에 있던 나이 지긋한 역무원은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기 재워줄 사람이 있으니 뒷방을 치워 놓으라는 얘기였다. 젊은 역무원은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라고 했다. 빨리 달리면 서울로 가는 마지막 기차를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모두가 미덥지 않았다. 나이 지긋한 역무원을 따라나서기도 버겁고, 젊은 역무원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기도 부담스러웠다. 밤이, 이 세상이 너무 어두웠기 때문이다.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자친구는 다른 일행과 술자리를 즐기던 터라 귀찮은 기색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계속 볼 처지에 후환이란 걸 고려해 택시를 타고 와서 서울까지 동행이 돼주었다.

 

서울로 출발하고 나서야 후의와 선의로 내밀어준 손길에 대한 고마움이 밀려왔다. 좀 전까지는 좀처럼 받기 어려운 제안들이었지만, 위기를 넘기고 나니 시골 인심이 온전하게 느껴졌다.

 

그 작은 역이 어딘지도, 그 얼굴들도 기억에 남지 않았지만. 그 마음만은 지금도 내 마음을 물들인다.

사랑을 놓치다란 영화 제목도 있는데 마지막 기차를 놓치는 것 정도쯤이야 다행인 영역에 속하지 싶다. 이젠 카카오 택시나 티맵 택시를 청해 가까운 찜질방으로 갔다가 첫차를 타도 될 일인데 뭐가 걱정일까.

 

실수가 없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고마운 마음들을 떠올리면 때론, 실수도 추억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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