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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얘기 하듯 말할까 바람이나 들으렴

  • iron
  • 2020-07-06 17:34
  • 4,509회

누가 내 글에 남편 이야기가 없다고 했다. 남편 욕을 할 거 같아서라고 했더니 그럼 쓰지 말라며 웃었다.

해서 머얼고 먼 옛날, 호랭이 담배 피우던 시절. 남편이 남편이 아니던 날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남편이 아니었으니 X라고 칭해보자.

 

대학교 1학년. 내 나이 열아홉 살에 동갑인 X를 만났다. 겨울날 풍물 동아리 연합 전수에서 설거지 짝으로 친해졌다.

설거지하며 이야기를 나눴다기보다 나 혼자 이야기를 하고 X는 듣는 식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생각했단다.

겨울 전수 뒤 낮에는 집회에서 만나고 밤에는 술자리에서 마주쳤다. 역시 나중에 들으니 다른 이들에게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 부러 그 장소로 자신의 일행을 데리고 가서 합석한 것이었단다.

난 우연인 줄 알았던 많은 것이 상대의 노력이었다. 좋아하는 선배가 군에 있다고 말을 해도 그저 꾸준히 내 곁에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 집회에서 전경에 쫓겨 달리다가 뒤통수를 엄청 세게 가격당했다. 적진에 이대로 쓰러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교문까지 뛰어와 기둥에 등을 대고 앉아 눈을 감았다.

괜찮아?” 눈을 뜨니 걱정스러워하는 사람들 맨 앞에 X의 얼굴이 있었다. (처음 집회에 나왔다, 전경이 치고 들어오니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쇠파이프로 내리쳤다, 미안하다는 누군가의 사과를 듣자 , 적에게 당했다.’ ‘이거 피가 흐르는 건 아닌지.’ 하던 부상자의 아픔은 싹 가시고 무안함만 남아 벌떡 일어섰지만.)

술 마시고 한창 토하던 시기. 화장실에 가면 X가 뒤따라와서 문을 노크하고 괜찮아?” 늘 물었다.

 

내가 토하거나 웃는 게 술버릇이라면 X는 자는 게 술버릇이었다. 토하고 나오면 화장실 앞에 앉아 있다가 자기 옆자리를 두드리며 앉으라고 했다.

무슨 할 얘기가 있나 싶었지만, 그저 무릎을 감싼 두 팔에 머리를 묻고 졸았다. 하지만 친구들 눈엔 일행과 떨어져서 두 사람만 따로 앉아있는 모양새가 꼭 사귀는 모양새처럼 비치기도 했다.

술자리가 끝나면 조수처럼 비서처럼 내 가방을 챙겨 매던 X와 그렇게 서서히 커플이 되어갔다.

 

당시엔 잠자는 술버릇이란 것도 순수하게 느껴졌다.

술좌석 테이블 밑으로 짧은 반바지 밑 넓적다리를 주무르던 선배부터 할 얘기가 있다고 따로 불러놓곤 일방적인 키스를 하던 선배에 함께 걸어가며 어깨에 올린 팔을 떨어뜨리는 척 허리와 엉덩이로 몸의 선을 쓰다듬던 선배까지. 원 별의별 가지가지 어이없고 황당한, 충격의 경험 사이에.

똑바로 앉아.”

쪼끔만. 쪼끔만.”

술자리에서 그저 내 어깨에 살짝 기대어 자는 X는 차라리 귀여웠다.

탁자 위에 엎드려 자며 일행이 깨워도 꿈쩍 않다가 나 먼저 간다.” 귓가에 작게 얘기한 내 한 마디에 벌떡 일어나던 모습엔 무의식중 성의가 배어있었다고나 할까.

 

내가 공장에서 잠시 일하던 때. 여느 때처럼 전화가 왔다. 뭐가 먹고 싶냐고. ‘포도, 복숭아, 천도, 자두, 살구, 파인애플, 바나나, 줄줄이 읊었다.

주야 맞교대로 일을 해도 월 40만 원이 안 되는 돈을 받았다. 같이 입사했다가 건강이 안 좋아 먼저 나온 한 지인과 둘이 생활하기에 빠듯했다.

입안에 꽉 차는 50원짜리 빅파이 하나를 우물거리며 먹는 게 급여 날 유일 호사 정도였다.

 

그런데 다시 금방 전화가 왔다. 방 근처라고. 군대에서 휴가 나왔다고.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은대상일 뿐이었던 과일을 잔뜩 사서 들고 있었다. 검은 봉지 위로 그 귀한 파인애플 꼭지까지 뾰족 나와 있었다. 감동.

12시간 일을 하고 공장 셔틀버스에서 내리니 X가 정거장에 마중 나와 있었다. 방에 가니 밥을 짓고 콩나물국을 끓이고 두부를 부쳐 차려놓은 밥상이 있었다. 감동.

아무래도 난 먹는 것에 약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X가 자기네 고깃집 하니까 가면 공짜라고 해서 연휴에 놀러 다니다 친해진 맥락과 같지 않을까 모르겠다.

 

노력이 가상해서 결혼이란 은총을 내려줬건만. 세월의 장난으로 그리된 것일지 모르겠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며 언젠가 남편의 전화기를 보니 나를 이라고 저장해 놓았다.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사랑. 내가 남편에게 바치는 주제가는 이런 거다. ‘사랑 했었어/ 후회 없는 사랑을 했어/ 한때는 전부였지만/ 새로운 만남을 위해 이쯤에서 끝내/ 나에게 미련을 갖지 마

그래도 좋은 친구로 남을 남편이. 언제나 내가 선택하는 일에 싫다거나 안 된다거나 하는 토를 달지 않는 남편이. 이 글에도 속없이 또 좋아요를 누를 것도 같다.

 

 

댓글목록

초록별님의 댓글

초록별 작성일

남편은 아니지만... 좋아요를 눌렀어요... 어떤 속인지는 잘 모르지만요...

iron님의 댓글의 댓글

iron 작성일

권유하다 게시판글 페이스북에도 공유하거든요. 페이스북 친구인 남편이. 벌써 좋아요 눌렀죠.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