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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 보기

  • iron
  • 2020-06-29 16:03
  • 4,381회

칭찬이라기보다 칭송이라 해야 맞을까. 나는 동네에서 착하다고 소문난 아이였다. 수줍음 많지만 인사성 밝고 말 잘 듣는 아이. 아줌마들은 딸 삼고 싶다고 했고, 할머니들은 며느리 삼고 싶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도 짝꿍 한번 꼬집는 일 없이 지냈다. “아우 야~” 하는 한마디 정도가 상대에게 하는 항의 같은 거였다

학년이 끝날 때나 모임을 마칠 때 친구들끼리 돌려서 써주는 한 줄 평가도 착하다는 표현에서 친구들의 지적 성장에 따라 온유하다는 평가로 바뀐 정도였다.

 

아기와 아이를 좋아했다. 초등학생 때였을 텐데 아기를 업고 싶고 돌보고 싶은데 떨어뜨릴까 봐 어른들이 넘겨주지를 않았다.

베개를 업고 문지방을 넘나들며 어른들 앞을 괜히 왔다 갔다 하던 일이 생각난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일종의 침묵시위였는데 먹히지 않았다. 체구가 나보다 큰 사촌 동생은 아기를 돌볼 수 있었는데 말이다.

가지 모양 오이 모양 색색깔 모양 단추가 달린 보라색 원피스를 입었던 어느 날. 나보다 어린아이가 내 옷에 달린 단추를 부러워해서 옷에는 실밥만 남기고 단추를 이로 하나하나 끊어서 몽땅 내어준 기억도 있다.

 

착하다’... 내가 원하는 게 무언지 표현하기보다 어른들이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에 주목하며 살았으니, 친구들에게 화를 내는 일도 없으니 돌아오는 피드백이 그러했다.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서 나도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고 살았다.

아기와 아이를 좋아한다’... 아기가 있으면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저 병아리나 새끼 고양이나 강아지를 좋아하는 맥락이었다.

짜증 내고 울고 아픈 아기는 그 아기의 엄마가 돌볼 일이었다. 나는 아기가 방긋방긋 웃을 때나 쌔근쌔근 잠들었을 때 얼굴을 들여다보며 아기는 천사구나.’ 작은 손을 가만히 쥐어보았을 뿐이었다.

 

첫째 아이를 키우며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 걸 알게 됐다. 소리를 질러본 적은 청군 백군 응원하는 운동회 때 정도였는데 첫 아이가 두 돌이 되기 전 둘째가 만삭일 때 목청이 트였다.

걸음마를 떼던 날부터 한두 걸음 조심스레 내딛기보다는 두어 걸음도 달리듯 내디뎌 품에 쓰러지던 아이.

이날도 역시나 달려와 품에 안겼다. 근데 이가 나려 해서 가려운 것인지 내 어깨를 꼬옥 깨물었다. “아야~”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판소리 명창이 폭포 아래 양동이로 피를 받아 가며 득음을 하는 순간이 이와 같지 않을까.

넓은 부위가 아니라 옷 조금 살 조금 좁은 부위로 깨무니 더 아팠다. 옷을 내리고 거울을 보니 피멍이 들어있었다. 살점이 떨어진 것도 아닌데 소리를 지른 건 어깨의 아픔도 있었지만. 꾹꾹 참고 꼭꼭 누르며 내내 견뎌온 독박육아라는 힘겨움의 분출 아니었을까.

 

누군가를 때려본 적이라곤 두 살 터울 남동생과 어릴 적 한 대씩 주고받는 싸움이 고작이었는데 첫째 아이 엉덩이를 때리기도 했다.

친정 지하를 고친 커다란 방 한 칸. 첫째와 둘째를 한 공간에서 같이 키울 수 있을까 모색하던 시간. 어린이집에 첫째를 등원시키기 전까지 두 달여 시간은 지옥 같았다.

둘째에게 젖을 주려고 하면 둘째의 머리를 밀었고, 둘째를 재워서 눕히면 침대 위로 올라가 쿵쾅쿵쾅 걸어 둘째를 깨웠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내 눈을 바라보며 반복했다. 둘째는 울음을 터뜨리고 나도 울면서 첫째의 엉덩이를 때렸다.

체벌이 아이를 가르치는 훈육일 수 없는데 그저 내가 힘들어 그렇게 했다. 생각지도 못한 동생이란 존재를 강제로 맞이한 세 살배기 첫째의 힘겨움을 헤아리기보다 내가 너무 힘들어 그렇게 했다.

 

아이에게 참을 수 없이 힘들 때면 아이를 내쫓는 엄마가 되지 않으려 내가 뛰쳐나갔다. 아이가 우니까 오래 나가 있을 수도 없어 밤하늘을 올려 보며 딱 한숨 몇 번 쉬고는 다시 들어가야 했다.

고개를 떨구고 내 밑바닥을 들여다보던 시간들. 히스테릭하다, 꼭지가 돈다, 뚜껑이 열린다, 적개심이 불타오른다, 등 들어만 보았지,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무언지 비로소 알게 됐다.

 

한번은 동네 택견 야외수업으로 수영장 앞에 아이를 데려다줄 일이 있었다. 어떤 아줌마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뒷자리 아이에게 욕을 했다. “빨리빨리 안 내려 이 시키야.” 내리는 걸 조금 기다려주면 되지 왜 욕을 할까 싶었는데 택시 뒷자리에서 아이들이 줄줄이 내렸다.

바로 공포의 삼 형제. 내가 모르는, 이 엄마의 고단함이 있겠구나, 너른 지평으로 이해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을 생각이다. 하지만 무난하기보다는 기질이 예민하고 또 조금은 성정이 특별한 아이를 키우며 나라는 사람의 그릇 크기를 알게 됐고, 나라는 사람의 밑바닥을 들여다보게 된 것을 부인할 순 없다.

어쩌면 아이가 별난 게 아니라 초보 엄마의 부족함으로 그렇게 힘들어했는지도 모른다.

당시엔 지금의 상황을 과거형으로 말하고 싶다는 큰 꿈이 있었다. 여하튼 꿈은 이루어졌다. 어쨌거나 나와 아이는 성장했다. 내가 아이를 키우기도 했지만, 아이가 나를 키우기도 했다.

 

 

 

댓글목록

피리님의 댓글

피리 작성일

"아이가 나를 키우기도 했다." 마지막 부분이 참 인상적이네요...!

iron님의 댓글의 댓글

iron 작성일

성찰 내지는 성불. 사리가 나올 거예요...